독립위해 한인애국단 창설
독립위해 한인애국단 창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3.31 16: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김구(金九 1876~1949) 독립운동가, 정치가.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 출신 18세에 동학(東學)에 들어가 갑오동학혁명때 동학군의 선봉이 되어 해주에서 죽산장을 습격하려다 실패 청계동 안태훈 의려소(義旅所)에 들어가 고능선의 가르침을 받았다. 여기서 만주로 건너가 김이언의 의병(義兵)에 들어가 평안북도 강계(江界)를 습격하다가 실패 귀국하여 1896년 2월 황해도 안악(安岳) 치하포 주막에서 일본군 중위 츠치다(土田)를 죽이고 돌아가 있다가 5월에 체포 인천 감리영에 갇혀 사형언도를 받고 8월 26일 사형이 집행되려다 왕의 특명으로 중지된 후 1898년 탈옥 감행했다. 삼남(三南) 각지를 방랑후 공주 마곡사(麻谷寺)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가 나와 고향에서 학교를 세우고 인재양성에 힘썼다.


1909년 11월 안중근(安重根)이 이토오(伊藤博文) 저격사건에 관련되어 해주에서 투옥되고 1910년 한일합방 직후 다시 나와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신민회(新民會) 간부회의에 참석 남만주에 군관학교를 세우기로 결의하여 기금을 모집하던 중 안명근(安明根)의 대라우치(寺內正毅)총독 암살미수사건에 관련되어 6년간 옥고를 겪고 1915년에 출옥했다. 1919년 3.1 독립운동 후에 중국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경무국장 내무총장이 되었다. 1930년 한국독립당을 조직 1932년 1월 이봉창을 일본에 보내어 일본 황제를 저격케 하였고, 4월에는 윤봉길(尹奉吉)로 하여금 상해에서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 이하 다수를 폭살케 하였다.

가흥 학교에 한인무관양성소를 설립 사관(士官) 백여명을 양성하였고, 1940년 중경(重慶)에서 임시정부 주석이 되어 한인애국단을 창설했다. 광복군 장병들로 하여금 조국탈환전을 전개할 것을 목적으로 우선 중국내의 일본군과 항전하는 한편 미국인 교관을 초빙하여 군대육성에 진력하던 중 8.15해방을 맞아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했다. 민주의원 총리 비상국민대회 회장 한독당 당수로 있으면서 통일자주독립 노선을 지향 1948년 4월 김규식과 함께 남북협상을 제안하고 북한 지도자와 평양에서 회담했으나 실패하고 돌아왔다. 그후 계속하여 남한 단독정권 수립에 불참하면서 이승만과 불화가 있는 가운데 1949년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했다.

김구는 자서전인 백범일지(白凡逸志)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이렇게 적어 놓았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느님이 물으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 다음 소원도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세 번째도 소리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자주독립이라 대답할 것입니다. 온 국민의 애도속에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