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소걸(三笑乞)
삼소걸(三笑乞)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4.06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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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태어날 때부터 웃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태어나는 그 순간을 잊어버려서 그렇지 탄생의 과정은 어마어마한 고통이라고 한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세상 밖으로 탈출하기까지 아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아픔을 견뎌야만 한다고 한다. 그래서 아기는 울고 태어난다. 그렇게 울고 태어나 울 일 많다가 울면서 죽어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눈물이야말로 인생의 동반자가 아닌가 한다.

우리는 사는 게 괴로울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가족, 친구, 재산, 건강을 잃었을 때 비로소 눈물을 흘린다. 가지고 있을 때는 막상 소중한 줄 모르다가, 잃고 나면 거대한 고통이 빈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어떤 이는 자살을 생각하고, 어떤 이는 거리의 삶을 선택하며, 어떤 이는 종교적 도피를 선택하기도 하며, 어떤 이는 마음의 문을 닫고, 어떤 이는 주저앉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고통의 양상은 달라도 그들 마음은 고뇌와 번뇌로 가득 차 있다.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 것 같아도, 고뇌와 번뇌를 벗을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첫째 단순해 져야 한다. 매사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긍정적이고 단순하게 생각해야 한다. 둘째 많이 웃어야 한다. 개가 웃는 것을 봤는가? 소가 웃는 것을 봤는가? 오로지 인간만이 웃을 수 있다. 살고 싶지 않다. 죽고 싶다. 인생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하며 괴로워할 때, 그런 자신을 바라보면서 한 번 크게 웃어 보라. “이것이 인생이야.” 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웃어서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지, 좋은 일이 있어서 웃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웃음 하나만으로도 큰 복을 쌓을 수 있다. 웃을수록 여유가 생긴다. 그리고 웃으면 무엇보다 자신의 고통이 남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아준다. 정이 많고 자비가 많아서 웃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 보이는 것 자체가 큰 업을 짓기 때문에,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는 뜻에서 많이 웃으라는 것이다.

웃음에도 종류가 있다. 첫째는 남을 비웃는 웃음. 둘째는 자조적인 웃음. 셋째는 우주적인 웃음, 즉 부처님의 웃음이다. 여기에 삼소걸(三笑乞)도 있다. 실상을 보고 웃고, 허상을 보고 웃고, 실상과 허상을 보고 웃고, 여기에 하나를 더해 실상과 허상을 보고 웃는 것을 보고 웃고…. 세상에는 웃을 일이 이렇게 많다.

많이 웃는 사람이 끝까지 잘 사는 법이다. 사형 집행장에 들어가는 길목에 피어난 꽃 한 송이를 보고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그 사람은 죽어서라도 좋은 곳으로 가게 되어 있다. 인간은 죽는 순간에도 웃을 권리가 있다. 이 아름다운 권리를 살아가는 내내 포기하고 산다면 무슨 낙으로 살겠는가? 웃음은 신이 준 선물이다.

그런데 나는 잘 웃지 않는다. 그러나 남에게 잔잔한 표정이 보이도록 노력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 좀 웃으세요.’하고 웃음을 요구한 적이 있다. 아들의 이 말이 나에게 너무 크게 들렸다. 나의 표정이 얼마나 굳어 있기에 아들이 이런 말을 했을까? 나는 왜 웃는 표정이 잘 되지 않을까? 나 자신이 변화하는데 잘 적응이 되지 않는 사람이 아닌가? 하고 나 자신을 돌이켜 보았다.

나는 어릴 때 증조부모·조부모·아버지·어머니 그리고 나의 형제들(나는 6남6녀의 장남) 또 한사람 우리 집 농사일 하는 머슴과 함께 대 가족이 함께 사는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음악도 없고, 놀이도 없고, 라디오도 없는 외부세계와는 교류도 없는 덕유산 아래 깊은 산골에서 눈만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자고 병들면 죽어야 하는 그런 환경이었다. 할아버지들께서는 늘 근엄하셨다.

식사도 손자들하고 같이 하시는 것이 아니고 따로 밥상을 차려 드셨다. 한 번도 어른들과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어른이란 어려운 존재,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로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특히 웃는다는 것은 경망스러운 행위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간혹 미친 사람이 피식피식 웃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어른들께서는 어쩌다 웃는 아이들을 꾸짖을 때 “미친 놈 같이 웃기는 와 웃노!”하고 나무라시곤 했다. 그래서 나의 가슴속에는 웃는다는 것은 부정적인 표현으로 자리 매김이 된 것 같다.

웃음은 질병을 예방하고 처세의 기본이라고 권유하고 있는 세상이 아닌가! 웃음이 얼마나 좋은 것이기에 죽는 순간에도 웃어라. 고 하고 있는가!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 웃으면 복이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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