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유성룡과 징비록
서애유성룡과 징비록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4.14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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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선조때 명상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 본관은 풍산, 군수 작(綽)의 손자 관찰사 중영의 아들. 일찍이 이퇴계에게 학문을 배워 문명(文名)이 있었으며 1567년 문과에 급제 한원에 들어가 1569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조 정령 무관(武官)이 되어 승지 부제학을 거쳐 상주목사때 예절로 다스렸으며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던 중 예조판서 재직중 간신이라 탄핵으로 물러나 3년동안 고향에 있었다. 형조판서와 대제학을 겸하였다.


예조판서에 이르러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많은 사대부와 함께 죄인의 글에 나타나 사퇴를 청하였으나 이조판서에 자리를 옮겼으며 이어 우의정에 승진 광국(光國)의 훈으로 풍원 부원군에 봉했다. 좌의정에 재직중 일본이 군사를 명나라로 들여 보내겠다고 기록한 국서를 보냈는데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는 이를 묵살하자고 했으나 성룡은 이 사실을 중국에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대로 실시 후일에 명나라가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품게했다. 선조가 명장을 천거하라고 했을 때 성룡은 권율, 이순신 등을 천거하여 뒷날에 나라의 간성(干城)이 되게 했으며 1592년 임진왜란때 왕을 모시고 송도에 이르러 영의정이 되었으나 신잡의 말에 의해 그날로 사직하고 평양에서 소동을 일으킨 난민을 진정시켰다.

뒷날 명나라에 구원의 길을 열었고 관서도체찰사가 되어 안주에 있으면서 백성을 진무하고 군량을 준비하였고 이여송을 만나 평양 지도를 주는 등 전투의 편의를 제공 왜적의 간첩을 수십명 잡아 적의 연락을 끊는 등 삼남 도체찰사가 되어 이여송을 도와 전진케 했으며 훈련도감제를 두어 군사를 훈련하는 등 다시 영의정에 보직 1596년 일본과의 화해를 주도했다는 누명을 쓰고 정인홍 등 무소로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와 1604년 호성공신에 책록 사당을 병산서원 뒤편에 세우고 여산의 퇴계묘에 함께 모셨다.

예악교화(禮樂敎化) 치병이재(治兵理財), 세제(稅制) 기혁 등 많은 업적과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징비록(懲毖錄)은 임진왜란의 수기(手記)로 1592-1598까지 7년간의 전쟁일기를 임진왜란이 끝난뒤 벼슬에서 물러나 한거(閑居)할 때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쟁사항을 16권7책으로 기록하였으며 그후 징비록을 추가로 보완 1권과 장계(狀啓) 1권이 있다. 징비란 중국 시경에 소비(小毖)편의 미리 경계해서 후한을 막는다(豫其懲後患)에서 구절을 따왔다. 선조께 군사를 양성 평소 대비하자는 건의를 하였으나 당시 조신들은 모두 반대 결국 화를 당하였다.

경북 안동군 풍산면 하회리 종가에 징비록을 소장하고 있고 임진왜란의 중요사료이며 저자 능문(能文)과 아울러 애독하는 책자로 국보 132호로 지정 관리중에 있다. 퇴계의 수제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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