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석루 공로자 구인회·추겸호
촉석루 공로자 구인회·추겸호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4.15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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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향토사학자

1959년 진주 촉석루를 크게 보수할 때 후원금을 가장 많이 낸 이들은 구인회님·추겸호님 라고 일간지에 보도됐다.

구인회 100만원. 추겸호 60만원. 현재가치로 1억 정도 될 것이다.
구인회(1907-1969)진주시 지수면 승산리에서 태어나 삼성 이병철과 지주보교에 동문수학했다.

1932년 대안동에서 포목상을 개설했고 구인상회로 발전시키고 은행에 예금했던 40만원을 토지매입에 투자해 만석꾼의 대지주가 되었다.
광복 후 부산으로 사업체를 옮기고 1947년 1월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하니 L.G그룹의 창업주가 되었다.

진주 칠암동에서도 역전제재소를 경영했었는데 이 때 촉석루를 크게 보수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진주교육감 강용성. 진주문화원장 박세제. 진주시 이정희 과장 등이 앞장서서 학생. 시민들을 상대로 성금을 모았다.
국비가 하달됐으나 경남도청에서 밀양 영남루 보수금으로 약 30% 깍아 배당하게 되자 부족금을 충당하기 위해 기업체·학생들에게 성금을 거두지 않을 수 없었다.

추겸호(秋謙鎬)는 경남도청 소재지 진주가 최신기계식 견직사업의 불모지임을 알고 대구에서 진주로 사업체를 옮겼다(1922년). 진주 최초의 견직사업체가 되었다. 대안동에서 시작해 발전적으로 강남동으로 옮기고 상평동으로 이전하면서 대통령 표창(1954년)을 수상했다.
그의 부친 추교정(秋敎廷)은 대구에서 유명한 국채보상운동을 지도하고 서상돈. 김광제 등과 함께 맨 먼저 가장 많은 성금을 냈다는 문헌이 있다.(대한자강회보 9호 147-149면)
구회장은 진주 시립연암도서관을 지어 봉사하고 연암공대의 설립은 아름다운 정신을 계승한 구자경이 주도했다.

추겸호의 장남 추연백 회장은 동양염직사를 경영하면서 진주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했다.
손자가 검사직을 사직하고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촉석루를 보수하기 위하여 설계도·기술자·감독 등이 모두 중요하지만 현금 후원금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촉석루를 원형 그대로. 설계도 그대로 복원하라는 문교부 장관의 공문을 문자 그대로 실천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반드시 성금이 가장 큰 공로자 역할을 했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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