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손목인(孫牧人)
작곡가 손목인(孫牧人)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4.22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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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향토사학자

작곡가 손목인(1913~1999)선생은 진주시 대안동 출신이다. 손목인 선생이 무슨 곡을 지었나 묻는 이가 많은데 이난영 가수가 부른 ‘목포의 눈물’ 김영춘 가수가 부른 ‘홍도야 울지마라’ 고복수 가수가 부른 ‘짝사랑’ 김정구 가수가 부른 ‘바다의 고향시’ 등이 있어 유명하다고 말하면 ‘아~그렇구나’ 하고 감탄한다.


필자가 목포시를 4번 찾아 갔었는데 갈 때 마다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가 누군가 라고 물어보면 당연하다는 식으로 이난영이라고 대답한다.

다시 작곡가는 어디 출신 누구인줄 아느냐 라고 말하면 아는 이들이 없었다.
손목인 선생의 별명은 손득렬이며 예명은 양상포를 사용한 경우도 있다.
손목인 작곡가의 부친은 손세영이며 진주 대안동에서 영세의원을 경영한 한의사였으며 김경숙. 서윤보. 리영숙. 강주식 등과 함께 진주지역 초창기 기독교인이다.

최초의 기독교계 근대식 광림학교가 설립되자 초대 학감으로 활동하고 세례도 받았다.
손세영 선생은 최초로 서양식 결혼식을 1908년 6월 14일 일요일 교회 예배당에서 거열휴 목사의 주례로 거행했다.

손세영 선생은 최초로 진주지역에 구세군 교회가 오게 한 장본인이다.
손목인 선생은 부친을 따라 서울로 옮겨 서울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전후에는 일본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했다.
2학년 재학중 방정환 선생의 영향을 받아 서울에 소재한 오케 레코드사의 전속 작곡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고복수 가수의 ‘항구야 잘 있거라’ ‘사막의 한’ 등이 히트를 치자 손목인 작곡가의 품격도 상승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이상한 행적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으나 좀더 구체적으로 연구할 과제로 본다.
손목인 선생은 드럼벳을 잘 불고 보기 드문 피아노와 아코디언 연주자라고 말한다.

손목인 선생은 1945년 광복 후 신태양 악극단 단장이 되고 ‘영동아가씨’ ‘봄날의 화신‘ ’타향살이‘ 등으로 위문공연을 실시했다.
그의 곡을 듣고 있으면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느낄 수 있다.

1947년 8월 서울중앙방송국 전속경음악단을 조직해 발전시키고 트롯트의 아버지로 호칭될 정도로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
도서출판 한국문화 회장이 되고 1987년 정부로부터 화관문화훈장을 받고 1999년 1월 서울 경운동 98번지에서 87세에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3남 1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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