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철학
바다의 철학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4.23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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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내가 바다를 처음 본 것은 국민학교 6학년 때였다. 수학여행으로 경주에 갔는데 해돋이를 보자고 선생님이 우리를 토함산으로 데려갔다. 거기서 떠오르는 아침해와 더불어 저 동해의 한 토막을 내려다본 것이다. 수평선이라는 것도 그때 처음 보았다. 엄청 신기했던 그 느낌이 지금도 기억의 한 구석에 선명히 남아 있다.


그 첫 대면 이후 바다와의 만남은 이제 수십 차례도 더 된 것 같다. 동해, 서해, 남해, 웬만큼 이름난 데는 거의 다 가봤다. 도쿄에 살 때는 태평양도 보았고, 독일에 살 때는 북해-발트해-지중해도 보았고, 그리고 지난 번 보스턴에 살 때는 대서양도 보았다.

그런데 가장 인상이 강렬했던 것은 저 남해바다다. 대학 3학년 때였다. 제주여행을 하겠다고 부산항에서 배를 탔다. 동백섬과 오륙도가 저만치 시야에서 사라진 후 이윽고 360도의 수평선이 눈에 들어왔다. 와~ 이건 정말 엄~청난 것이었다. 이게 바다였다. 이건 바닷가에서 보던 그 바다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 거대한 물덩어리! 그 넓이와 깊이. 그건 가히 압도적이었다.

내가 지구를 ‘사실상 수성’이라고 인식한 것도 바로 그때 거기서였다. 그리고 완벽하게 드러난 ‘넓이’라는 것을 온전히 대면한 것도 거기서였다. 내 눈이 담을 수 있는 최대의 넓이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하늘의 넓이와 거의 맞먹는 것이었다. 바로 그 바다, 바로 그 넓이가 내게 ‘스케일’이라는 것을 가르쳐줬다. 단일한 것의 스케일 치고 이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는가. 바다는 최고의 모델이요 최고의 스승이었다. 그것은 거의 하나의 ‘철학’이었다. 넓으라는, 깊으라는, 크라는 철학. 그것은 젊음 청년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하나의 교훈으로 남았다.

거기서 나는 저 중세 말 르네상스 초기의 철학자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를 떠올렸다. 그가 저 유명한 철학 ‘대립자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라는 것을 착안한 것이 바다 한가운데에서였다는 것을 어디선가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기야 저 수평선을 보면 직선과 곡선이라는 대립도 거의 하나로 일치해 버린다. 그리고 이 거대한 하나의 물덩어리를 보면 한 방울의 물과 거대한 바다라는, 말도 안 되는 이 대립도 그냥 하나로 일치해 버린다. 인간들이 설정한 온갖 대립이 참 사소한 것으로 부끄러워지는 이 대단한 경지, 바다는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니콜라우스는 아마도 거기서 ‘신의 눈’ 같은 것을 보았을 것이다. 모든 물들을 하나로 모으는, 오직 하나로 수렴하는 저 바다의 철학! 그것은 우리 인간이 배워야 할 거대한 덕이었다.

그때였다. 수면에서 뭔가가 뛰어올랐다. 아니 거의 날아올랐다. 날치였다. 그들은 지칠 줄도 모르고 뛰어오르고 또 뛰어올랐다. 하늘에는 7월의 태양이 타고 있었다. 젊었던 내게는 그들의 그 날갯짓이 꼭 저 태양을 향한 도전처럼 느껴졌다. 거기서 짧은 시 한 편이 탄생했다.

<날치의 오랜 꿈―그의 은빛이 눈부신 이유>
날자, 날아서/ 저기 저 붉은 해를 먹고야 말리// 하늘도 바다도, 새도 웃는다

그때 내가 느낀 바다의 웃음은 ‘격려’였다. ‘날치야 그래 날아라. 백번 천번, 지치지 말고 날아올라라. 저 붉은 것이 끝내 너의 입에 들어가는 일이 없다고 해도 너의 그 뛰어오름, 날아오름은 그 자체로 훌륭한 의미가 되는 거란다.’ 위를 바라본다는 것, 그리고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뛰어본다는 것, 날아본다는 것, 그러면서도 지치지 않는다는 것, 끝없이 거듭 시도한다는 것, 그런 의지, 그런 노력. 그것에 대한 격려였다. 수면의 찰랑이는 파도가 마치 날치를 던져올리는 바다의 손짓같이도 느껴졌다.

날치의 그 날갯짓에서 나는 저 소크라테스의 ‘영혼의 향상을 위한 노력’, 그리고 둔스 스코투스와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역설했던 ‘의지’라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아니 무엇보다도 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시포스를 연상했다. 산정을 향해 끝없이 바위를 굴려 올라가는, 그리고 굴러 떨어져도 또다시 굴려 올라가는 시시포스의 의지. 저 바다는 날치를 통해 그런 의지의 철학도 알려주고 있었다. 아니 날치만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바다 자신이 저 온 세상의 모든 해변에서 매일 매순간 거르지 않고 철썩이는 파도로써 그런 의지의 철학을 강(講)해주고 있었다.

오늘 가까운 거제 몽돌 해변을 다녀왔다. 거기서도 파도는 끝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의 사전에 포기란 없었다. 저러기를 벌써 몇 천 년 몇 만 년인가. 이런 시를 쓴 유영 시인도 아마 바다의 저 강의를 들었음에 틀림없다.

<파도>
파도는/ 내가 오기 전부터/ 내가 오기 전 몇 억천만 년/ 태초의 아침부터/ 저렇게 외쳤겠지/ 끊임없이 외쳤겠지/ 끊임없이 외쳤으련만/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바이 없어라/ (중략)/ 하고많은 흘러간 인류 중에서/ 알아들은 이 누가 있을까/ (중략)/ 들어보아도 들어보아도/ 내 알아 들을 바이 없어라/ (중략)/ 파도여 말하라/ 알기 쉽게 말하라/ 억천만년의 그 부르짖음/ 그 무언 신비의 절규/ 진정 무슨 소린지/ (중략)/ 물어도 빌어도 대답이 없어/ 기슭을 거닐며/ 온 종일 바보처럼/ 나 갈매기를 불러보고/ 조개껍질을 뒤져보고/ 뜻을 찾으며 찾으며/ 파도에 귀를 기울인다// 파도여 파도여/ 내일도 모레도 또 글피도/ 내 물음에 아랑곳없이/ 변함없이 파도는 부르짖겠지/ 아는 이 없이 쉬는 일 없이/ 끝이 없이 한이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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