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의 철학
바위의 철학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5.07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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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따져 보면 특별할 것도 없긴 하지만 우리 집에는 자랑할 것들이 적지 않다. 그 중 하나가 벽에 걸린 그림들이다. 그 중에는 북한산 어느 계곡의 바위를 그린 것도 있다. 기량 있는 원로화가로 생전에는 국전에도 이름을 올린 우리 장인께서 직접 그리신 그림이다. 나는 솔직히 이 그림을 피카소의 게르니카보다도 훨씬 더 좋아한다.


나는 한 동안 북한산 자락에서 처부모님과 가까이 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데, 나나 장인어른이나 이 산을 참 자주 찾았었다. 그때의 한 장면이 한 폭의 명화로 남은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고매하셨던 장인의 인품이 느껴져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이 그림이 꼭 그분의 자화상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 그림 속의 바위는 젊잖게 말이 없다. 언제나 고요하다. 그러면서도 단단하다. 그것은 온갖 풍파를 견뎌낸 속깊은 단단함이다.

생각해 보면 시끄럽지 않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큰 가치인지 모른다. 그것은 어디서나 귀가 먹먹한 소음에 시달리는 도시인이라면 누구나가 곧바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 바위의 침묵과 고요는 그 자체로 하나의 미덕, 하나의 철학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이 시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도 그런 것이다.

<바위가 말하기를>
어때?// 인간사 차마 보기 민망한 날은/ 그냥/ 바위가 되는 게 어때?// 머리도 눈도/ 귀도 입도/ 모두 벗어두고/ 바쁘던 팔 다리/ 다 접어두고/ 우두커니/ 그저 든든한 대지에 안겨/ 하나의 풍경으로 남으면 어때?// 그래도 거기/ 아니/ 그래서 거기// 새들도 쌍쌍이 날아와 놀고/ 이슬도 그리고 햇살도 맘껏 뒹굴고/ 고단한 바람도 날개 거두고/ 다같이 어울려 아름다울 텐데…// 오늘은/ 세상 시끄러운 오늘 하루는/ 그렇게 우리/ 바위가 되어 좋으면 어때?// 어때?

‘인간사 차마 보기 민망한 날’이 어디 하루이틀인가. 일년 365일 하루하루가 거의 매일 그렇다. 저녁때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 시끄러운 오늘 하루’가 아닌 날이 없다. 자동차나 기계의 소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의 사람들도 너무너무 시끄럽다. 요즈음은 왠지 음악조차도 시끄러운 것들이 많다. 그럴 땐 정말이지 인간들의 얼굴에서 입이라는 것을 아예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얼굴에도 컴의 자판처럼 Delete 키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티비 리모컨처럼 ‘조용히’ 버튼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게다가 주변에는 웬 경박한 사람들이 또 그리 많은지…. 생각도 가볍고 입도 가볍고 처신도 가볍다. 선택과 결정조차도 가볍다. 어찌 보면 온 세상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가득 차 있다. 가볍더라도 깃털은 따뜻하기라도 하고 민들레 씨앗은 아름답기라도 하지. 인간들의 경박함은 그저 문제를 양산할 따름이지 않은가. 그런 문제에 부딪힐 때 나는 문득문득 저 그림 속의 묵직한 바위를 떠올리곤 한다.

바위는 언제나 젊잖게 그 자리에 있으면서 ‘고요하라’고, ‘무거우라’고 우리를 가르친다. 나는 거기서 어떤 ‘침묵의 철학’, ‘신중함의 철학’, ‘무게의 철학’ 같은 것을 배우곤 하는 것이다. 내가 기회 있을 때마다 거듭 강조해 왔듯이 ‘침묵의 말없음’은 결코 무지의 증거가 아닌 것이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 ‘언어로의 도상’ 등에서 알려주듯이, 침묵은 때로 그 어떤 웅변이나 달변보다도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언어의 형태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하늘’이 우리 인간에게 말하는 방식도 그런 것이다. 공자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천하언재. 사시행언 백물생언. 천하언재’라고 말한 적이 있다. 행동으로 결과로 보여주는 것이 하늘의 말없는 언어인 것이다.

바위는 꼭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그의 말을 건넨다. 그는 비도 눈도 바람도 이끼도 마다하지 않는다. 맨몸으로 그것을 마주한다. 바위에게는 그런 ‘포용의 철학’, ‘수용의 철학’이 있다. 그는 또 웬만한 힘에는 부서지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우리에게 ‘단단하라’고, ‘견뎌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에게는 그런 ‘강인함의 철학’, ‘인내의 철학’이 있는 것이다. 약해빠진 요즘의 젊은이들에게는 이런 바위의 철학을 교양필수로 가르치는 게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정치하는 분들의 가벼운 말과 처신이 걸핏하면 문제를 일으킨다. 정책이라는 것도 법이라는 것도 가볍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국회의사당이나 정부 청사 앞에도 커다란 바위를 하나씩 갖다 놓으면 어떠할까? 좀 나아지려나? 장인이 살아계시면 국회용 정부용으로 바위그림을 한 두어 장 더 그려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은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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