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교동 최부자집과 법주
경주교동 최부자집과 법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5.12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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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경주 교동 최부자집은 370년전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터잡고 살다 250년전에 현재 살고 있는 교동으로 이사오면서 집을 뜯어 옮겼는데 90칸으로 줄였다. 대문채를 수리하다 보니 대들보에 숭정 4년이라 연호가 쓰여있어 서기연도로 1644년이 였다. 만석군으로 내려오면서 손(孫)이 귀하여 단신으로 내려오는 경우가 많아 재물을 지켜졌던 측면도 크고 20리내에는 걸인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였으며 의병(義兵)에게 많은 재산을 투자하였다. 그리고 증조부의 택호가 물봉이였는데 말에 지필연묵(紙筆硯墨)을 싣고 다니면서 학자집 등 지필연묵이 없는 집에 몰래 놓아주고 하였다.


그리고 쌀 떨어진 집에 쌀 갖다 놓는건 물론이고 장사(葬事) 지낼 때 시장 장사꾼이 다 철시(撤市)할 정도로 인심을 얻었다. 사랑방에는 언제나 손님이 유숙(留宿)하였는데 우리나라 마지막 왕세자 이강, 스웨덴 황태자, 이시영 부통령, 초대 주미대사 무초와 같은 큰 손들도 줄줄이 최부자집 사랑방에 묵어갔고 지나는 과객(過客)도 날마다 사랑방에서 자고 가는 손님이 많았다. 항일의식과 독립정신의 핏줄을 타고 연연이 이어졌다.

명문의 자부심과 공동체를 위한 헌신과 희생의 바탕위에 생겨났다는 것을 이시간에도 명심했으면 한다. 사랑방에 놓여있는 문갑과 경상등 가구가 일제 강점기 때 공예를 전공했다는 현재 가문을 지키고 있는 최경씨의 아버지 최종씨가 직접만든 물건으로 손기술이 좋은 내림으로 최경씨도 간단한 가구는 만들어 쓰고 있다.

최경씨의 어머니 배영신 여사는 음식솜씨가 빼어났기에 누룩을 띄워 찹쌀을 발효하는 가양주를 빚는데도 능했다. 1986년 정부가 인증하는 중요 무형 문화재 교동법주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법주를 처음 빚은 사람은 최경의 10대조인 최국선인데 그는 조선조 숙종때 임금의 수라상을 감독하는 사옹원의 참봉 벼슬을 지냈다. 본직은 미관말직이지만 임금의 음식담당이라 사대문 밖 사람은 쓰지않고 충신의 자손을 썼다.

국선조부의 최진립장군이 임란때 공을 세운 충신이어서 사옹원에서 일할 수 있었다. 국선조부가 은퇴하고 고향에 내려와 궁중에서 빚던 술을 빚기 시작한게 교동법주의 시초가 됐다. 교동법주는 곡주특유의 향긋한 냄새와 혀에 감기는 달콤한 술맛을 내는 효모가 살아있는 술이다. 생효모라 오래 보관하지 못해 대량 유통은 불가능하여 소량만 빚는다. 교동 최씨가문 며느리는 대대로 법주 빚는 법을 전수받았다. 왕과 문무백관이 즐겼다는 궁중술, 교동법주, 한산소곡주, 문경 호산춘과 함께 조선의 3대 명주로 꼽힌다. 뿌리깊고 오래된 것이 가장 새로울 수 있다. 전통에서 새로움을 찾지 않으면 우리네 삶은 경박(輕薄)해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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