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의 철학
발자국의 철학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5.17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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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한참 전의 일이다. 이사를 했다. 짐정리를 하다가 앨범을 툭 떨어뜨렸는데 그게 펼쳐지면서 갈피에 끼워두었던 딸아이의 출생 기념 발도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사는 게 바빠 오랫동안 못 본 탓인지 어떤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이 가슴 깊은 곳에서 번져나왔다. 너무너무 작고 귀여웠다. 그 보송보송한 느낌도 아직 손끝에 남아 있다.


어느새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했지만 그 발은 아직도 작고 예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작은 발이 그동안 참 여러 곳을 밟으며 나름의 삶을 살아왔구나… 싶었다. 그 무수한 발자국들이 어찌 보면 곧 이 아이의 인생의 기록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기야 그런 것을 우리는 보통 ‘족적’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했던가?

우리 시대야 그런 발도장 같은 것을 찍어 남겨두는 부모님들이 거의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 작은 발자국이 어딘가에 찍히지 않았을 리는 없을 터. 나는 문득 나 자신의 그 작은 발자국이 그리워졌다.
 
나는 그 발자국이 그 이후 어디어디에 찍히게 되었는지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것들은 물론 곧바로 지워지면서 이제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는 않지만 염라대왕이 관장하는 시간창고의 어딘가에는 아마 고스란히 그 기록들이 보관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의 시가 되었다.

<남은 발자국>
마음에 지도를 펼쳐놓고/ 반백년 다닌 자취를 표시해본다/ 어디에 발자국이 있는지/ 어디에 발자국이 없는지// 마른 곳 진 곳/ 나의 정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찍지 못한 발자국들이 문득/ 스멀스멀 살아나 내 머리를/ 등을/ 꼬리를 밟으며 지나간다// 내 안에서 뭔가가 슬금슬금/ 신발끈을 살핀다// 푸른 곳으로 가야겠다

돌이켜보니 나의 작은 두 발은 참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그 발자국은 물론 집과 학교, 집과 직장에, 그리고 그 도상에 가장 많이 찍혀 있다. 그 사실 자체가 인생의 진실 한 자락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다. 그것은 지금은 사라진 만화가게로도 향하고 있고, 친구들 집으로도 향하고 있고, 그리고 ‘그녀’의 집 앞을 서성이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전국 방방곡곡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 중국, 독일, 미국의 여기저기에도 수두룩하다. 그 모든 발자국들을 생각해보면 한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참 묘하고도 묘한 것이 그 발걸음 내지 발자국들은 우리가 잘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절대적인 힘에 의해서 이끌린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갈 수밖에 없어서 간 것이거나 혹은 좋아서 간 것이거나, 그런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에 이런 시를 쓴 적도 있다.

<어느 친절한 적막의 화두>
왜 나는 산으로 갔을까?/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고 바람조차 고운 날/ 스무 살 뜨거운 몸뚱아리로/ 그때 나는 왜 산으로 갔을까?// 왜 나는 강으로 갔을까?/ 낮달이 아는 듯 모르는 듯/ 비밀스런 마음 한 자락 꽃인 양 가슴에 품고/ 왜 하필 나는 강으로 갔을까?// 왜 나는 그때 숲으로, 그리고 바다로,/ 나비가 꽃으로 가듯, 갔을까?// 반백년 숱한 발걸음들을 되돌아보며 나는 묻는다// 이 물음들 속에 오래 찾던 진리가 숨어 있음을/ 여기저기 숨어서 웃고 있음을/ 어느 친절한 적막이 넌지시 알려준다// 무심한 강아지 한 마리 지나간다. 진리다/ 해는 구름 속에 숨었다가/ 다시 얼굴을 내밀고 따스하게 웃는다. 진리다// 만유는 저리도 착실하고, 그리고 푸르다/ 무릇, 이와 같다

산, 강, 숲, 바다… 나의 발걸음이 향했던 곳들. 그곳들은 그냥 무조건적으로 좋았던 곳이었고, 그런 ‘좋음’이 나의 발길을 그리로 이끈 것이었다. ‘발길은 좋음에 의해 이끌린다’는 것, 나는 그런 것을 ‘진리’의 일부로 파악했다. 그런 진리에 의거해 나는 지금도 틈만 나면 한강변 산책길에 나의 발자국을 찍기도 한다.
그런데 또 하나 참 묘한 것이, 사람들의 발걸음은 그렇게 대개 각자의 고유한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산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산에 발자국을 찍지 않는다. 책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서점이나 도서관에 발자국을 찍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발자국이란 곧 그 사람의 인격이요 정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발자국들은, 내식으로 말하자면 주로 ‘마른 곳’에만 찍히게 된다. 이른바 ‘진 곳’, 즉 불편하고 어려운, 따라서 싫은 곳은 피해서 가게 마련인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다 그렇다. 부끄럽지만 나라고 별반 다를 바 없다. 살아오는 게 비록 정신없는 것이었다고 해도 한번 쯤은 고단하고 짐 진 자들의 곁에 나란히 그 발자국을 찍어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또 그래야만 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것을 지금도 부채의 하나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나는 저 시에서 ‘남은 발자국’을 고민한 것이다. 돌아보면 결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진 곳’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겨 놓았다. 그 발자국들이 이 세상을 그나마 ‘푸른 곳’으로 만드는 데 얼마나 크게 기여했던가.

나는 요사이 학교강의는 물론 나에게 주어지는 온갖 외부강연 자리에 기꺼이 그리고 부지런히 나의 발자국을 찍고 있다. 그 자리에 나는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겠지만 공자, 부처, 소크라테스, 예수의 발자국을 함께 찍어 놓는다. 40여년에 걸친 내 철학공부의 귀착점이 바로 이 분들이다. 특히 예수의 행적은 놀라운 것이다. 30수년에 걸친 그의 삶에서 그의 발걸음이 가장 빈번히 향했던 곳은 ‘아픈 사람’이 있는 곳, ‘소외된 사람’이 있는 곳, ‘수고하고 짐 진 사람이 있는 곳’, 그런 곳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물론 기본적으로 ‘구원’의 발걸음이었지만, 구체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치유의 발걸음, 가르침의 발걸음이었다. 그 발걸음이 지금도 저 이스라엘 이곳저곳에 투명한 빛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나는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시인으로서, 선생으로서, 함께 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동시대의 친구들에게 바로 이런 ‘발자국 찍기’를 하나의 숙제로 권하고 싶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당신의 지금까지의 발자국들은 과연 어디어디에 찍혀 있으며, 그리고 앞으로 당신은 과연 어디어디에 당신의 그 늙은 발자국을 찍을 것인가. 제발 저 잘 만든 신발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그런 발들이 되어줬으면… 그렇게 나는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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