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면
짜장면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5.26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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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숙/수필가ㆍ경남수필문학회 회원

 
봄볕을 이고 꽃길을 걷다가 점심때를 놓쳤다. 마을로 들어가 제법 걸었건만 식당이 보이지 않는다. 지나가는 아주머니에게 요기를 할 만한 곳이 있냐고 묻자 자신이 안내하겠다며 따라 오라고 한다. “탕 탕” 중국집에서 날 법한 소리인데 간판이 없다. 말없이 앞서 가던 아주머니는 미닫이마저 제대로 닫지 않아 가게 이름이 신흥인지 흥신인지 애매한 집 앞에서 멈추더니 들어가잔다. 식당 안에는 탁자 세 개와 호랑이가 그려진 액자, 면이 카랑하지 않은 큰 거울이 전부다. 숫자가 큼직한 달력에는 글자인지 그림인지 아리송한 것들이 행간을 채우고 있다.

주문한 요리를 기다리는 손님들이 단무지와 양파와 춘장을 자신이 직접 가져간다. 주방과 식당 사이에 있는 작은 문으로 주인이 몸을 수그리고 나온다. 넉넉한 몸매에 질끈 묶은 은회색 머리, 철 지난 반팔 옷에 앞치마는 번들거린다. “춥지 않냐”는 말에 좁은 주방에서 움직이니 땀이 난단다. 면발 뽑는 소리가 그치면 주인아저씨가 배달을 가는 걸 보니 요리는 아주머니가 하는 모양이다.

어느 수필가의 ‘짜장면’을 떠 올린다. 어딘가 그 집의 풍경과 비슷하다. 양념 통을 열어 보니 굵고 붉은 고춧가루가 바닥에 깔려있다. 간장병과 식초병에 때는 끼지 않았지만 주인의 모양새는 닮은 듯하다.

다른 사람들의 짬뽕이 나오고 우동이 나오더니 노란 멜라민그릇에 담긴 짜장면이 나왔다. 내가 가져오지 않은 단무지와 양파, 물을 내놓으며 “우리 집은 손님이 반찬을 가져 간다우” 말도 함께 놓고 간다. 위에 얹는 고명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짜장면이라면 달걀 반쪽에 오이채 정도는 나오는 것 아닌가. 하다못해 완두콩이라도 있으려나 싶어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들춰 보아도 양파와 호박 외에 특별한 건더기가 없다. 겉보기와는 달리 면이 가늘면서도 쫄깃하고 간이 맞다. 젓가락에 감긴 면발이 양념과 어우러져 입 속에서 몇 번이나 머물렀을까. 금방 바닥이 드러난다. 아쉬워 두어 번 젓가락을 휘저어 보았지만 바닥에 황칠만 생긴다.

마을을 구경하면서 먹을 요량으로 군만두를 포장해 달랬더니 손이 모자라 면요리만 한단다. 쪽문을 열고 나오는 아주머니가 짜장면이 남았다며 내민다. 만두를 시킨 것이 양이 모자라서 그런 줄 알았나 보다. 부부도 내 앞자리에서 후루룩거리다가 자신들의 점심을 들어 준 것 같아 일어서는 나를 붙잡아 앉힌다. 먹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아주머니가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한 달에 두 번씩 노인들을 위한 무료급식 봉사에 참여하므로 쉬는 날이 없단다. 어제는 팔남매가 노부모님을 모시고 휴가를 가게 되어 쉴 수밖에 없었다며 모두 잘 살기에 모이기는 쉬운데 날짜 잡기가 어렵다고 했다. 순간 사레가 들어 기침이 계속 나왔다. 이런 형편에서도 잘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상황 판단이 안 되어 헤매고 있는데 아저씨가 면발을 부드럽게 뽑아 주어 자신이 맛을 내기가 수월하다며 너스레를 떤다. 그러다가 마을 사람들이 별 재료가 들어가지 않아도 간이 맞아 찾아준다며 목젖이 드러나도록 웃는다. 짙은 눈썹 아래에 있던 눈이 대책 없이 숨었다. 그 모습이 낯설어 웃는 내 앞에서 아저씨의 입에 묻은 양념을 스스럼없이 닦아 주고는 두툼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주무른다.

멈추지 않는 넉살에 먹은 짜장면이 소화가 될 정도로 한껏 웃었다. 꾸밈없는 마음이 상대방을 단순하게 만드는 걸까. 낯가림이 심한 편인데 오래 전에 알았던 사람 같다. 나를 사레들게 한, 잘 산다는 그녀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단지 넉넉한 생활에 대한 서로의 개념 차이일 뿐이다.

밝은 표정과 소신에 찬 행동이 감사하는 마음과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것 일게다. 형편이 어렵다고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하므로 상대방에게 편안함을 주는 것. 욕심을 채우고자 인색하지 않고 내가 손해 보는 것. 그리하여 이따금씩 생각나게 만드는 것이 이 집 주인내외의 세상을 살아가는 철학인 것 같다. 잘 사는 법에 대해 말없이 행동으로 깨달음 준 그 부부의 짜장면 값에 노인들의 무료 급식 때 몇 가닥의 면발이 될 내 정성을 얹어두고 나왔다.

사랑하고 베푸는 마음을 생의 에너지로 삼는 삶. 일상에서 ‘받기’보다 ‘더 주기’의 중요함을 몸소 실천하는 부부가 나를 돌아보게 한다. 바동거리며 사느라 소원해진 사람들과 아직 내 마음 수첩에 들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짜장면을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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