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의 철학
뿌리의 철학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6.18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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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언제부턴가 우리집 식탁에서는 밥이 사라졌다. 건강제일주의인 아내가 밥 대신 고구마나 감자를 거의 주식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밥은 바깥에서 먹는 걸로 충분하다는 게 주방의 권력자인 아내의 주장이다. 나나 딸들이 고구마나 감자를 싫어하지 않는 게 천만 다행이기는 하다.


그런데 어느 날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감자꽃’이라는 사진을 보게 되었다. 시인으로서의 감각 때문일까? 마음속에 미묘한 파문이 일었다. ‘아하, 감자에게도 꽃이 있었던가?’ 모르던 바는 아니었지만 어떤 새삼스런 인식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다. 예전에 시장에서 고구마 줄기라는 것을 사다가 무쳐먹었을 때도 그와 비슷한 느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 감자나 고구마나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둥글고 길쭉한 것이 다는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가 즐겨먹는 그 둥글고 길쭉한 것들은 감자나 고구마라고 통칭되는 한 식물의 일부 즉 뿌리 부분인 것이다. (물론 감자는 학문적으로는 뿌리가 아니고 땅 속 줄기의 마디가 비대해진 것이라고 설명되지만, 땅 속에 묻혀 있는 식물의 아랫부분인 이상 일반적 관념으로는 넓은 의미의 뿌리로 간주해도 별 상관은 없다.) 그 뿌리가 그 식물의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다. 물론 그 대표성이 맛있고 몸에 좋기 때문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생각해보면 그런 것들이 제법 많다. 연근도 그렇고 우엉도 그렇고 토란도 그렇다. 더덕도 도라지도 마찬가지다. 인삼을 비롯한 한약재들은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런 애들은 그래도 팔자가 좋은 편이다. 사람들에게 특별한 취급을 받고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같은 뿌리이면서도 일반적인 식물의 뿌리들은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땅속에 묻혀 있고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문득 그것들을 들추어내 조명을 비춰주고 싶어졌다. 땅속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어떤 점에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어둠에 묻혀 시선도 받지 못하는 것이 도무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국가에서든 우리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던가.

아닌 게 아니라 ‘뿌리’라는 게 없다면, 있더라도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식물은 없다. 뿌리는 생명의 원천이다. (아니 어떤 점에서 그것은 만유의 원천이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가 자연의 근원(arche)으로서 지수화풍[흙, 물, 불, 바람[공기]] 네 가지를 들고 그것을 ‘뿌리’(rhizomata)라고 부른 것도 그런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근원이니 근본이니 근거니 하는 말들에 보이는 뿌리 ‘근’(根)자도 다 그 중요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수년전 대만의 화련에 갔을 때 수 미터의 바위를 뚫고 내려가 그 밑에 있는 흙을 찾아 뿌리를 박은 이름모를 어떤 식물을 보고 경이를 느낀 적이 있었다. 또 중국의 장가계에 갔을 때 하늘 높이 솟은 까마득한 바위산 꼭대기에서 자라는 나무를 보고서도 감탄을 한 적이 있었다. 천 길 낭떠러지의 바위를 움켜쥐고 있는 그 뿌리의 힘은 얼마나 강인한 것인가. 미국 애리조나의 황야에서 자라는 사보텐의 뿌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런 강인한 생명력을 저 뿌리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뿌리는 본능적인 감각으로 물과 영양을 찾아나간다. 식물에게는 그것이 곧 절대선이다. 그런 선의 지향도 우리는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저 뿌리들은 무엇이 좋은 것이며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

우연히 읽은 한 저명한 원로 목사님의 글에서 “뿌리가 밖으로 드러나려 하여서는 안 된다. 뿌리는 항상 흙 속 보이지 않는 자리에 묻혀 있으면서 나무를 지탱하여 준다.”는 말을 발견했다. 평범한 듯 보이는 말이지만 나는 무릎을 쳤다. 바로 이것이 뿌리의 덕이 아닌가. 그것이 묵묵히 어두운 땅 속에서 제 역할을 하는, 즉 물과 영양을 흡수해 줄기와 잎으로 보내주고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게 해주는, 뿌리의 말없는 철학이 아닌가. 그러다 보면 그 중 더러는 고구마나 감자처럼 그 자체가 결실이 되기도 한다. 참 아름다운 자세요 숭고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스스로 드러나려 하면, 그래서 밝은 땅 밖으로 나오면 뿌리는 곧 말라서 죽게 된다. 그 식물 전체를 죽게 만든다. 그래서 뿌리들은 말없이 땅속에 묻혀 있다. 우리 주변에 그런 뿌리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우리는 한번쯤 철학자나 시인의 눈으로 그 땅속을 투시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봄과 드러냄이 바로 철학이나 시의 덕목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전공한 현상학의 핵심도 봄(Sehen)과 드러냄(erscheinen lassen) 그것이었다.

이른바 ‘리좀’(根莖; 뿌리줄기)이라는 것을 학문적으로 부각시켜며 “이분법적인 대립에 의해 발전하는 서열적이고 초월적인 구조와 대비되는 내재적이면서도 배척적이지 않은 관계들의 모델로 삼은”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도 아마 이런 뿌리의 철학을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더욱이 그들은 뿌리들 각각의 독립성과 복합성을 리좀이라는 다소 어려운 단어로 상징해 보여주고자 했다.
남들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오늘도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뿌리들이 땅속에 뿌리를 박고 열심히 성실하게 버티면서 영양을 탐색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뿌리들을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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