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부원군 충정공 마천목
장흥 부원군 충정공 마천목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7.22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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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향토사학자

마씨는 본래 중국 성씨로 중국 10대 성씨에 들며 약 5000만명이 넘는다. 마한 때 마겸이 처음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마여는 백제 온조왕 때 좌보를 지내고 백제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다.


마씨 족보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 때 내린 사성이라고 기록됐다. 장흥,목천 두 본이 전하는데 공신으로서 하사받은 땅 회령이 장흥으로 변경되었고 한 편으로 마점중의 후손과 개성부윤 마혁인의 후손이 서로 본관을 달리 한다고 말한다.

고려 시대에 엄청난 인물들이 배출되는데 마혁인의 후손 마엽은 고려 인종 때 병부상서(국방부 장관)을 지내고 그의 아들 마의유는 홍주목사. 마희원은 정 1품 시중 겸 평장사에 올랐다.

이어 마중기는 문과에 장원하고 문장가로 유명하고 이어 마지백은 국자감 박사가 됐고 마만손은 정 2품 평장사에 올랐다.

조선 시대에도 문과 급제자 5명과 생원, 진사 60여명을 배출했으니 소수 명문이다.

충정공 마천목은 태종 이방원을 도와 조선을 개국할 때 공을 세우고 제1차 왕자의 난과 2차 왕자의 난을 도와 대호군을 거쳐 대장군이 되고 좌명공신에 오르고 병조판서(국방부 장관)가 되었다.

이 때 아들도 음직으로 1등급이 오르고 논, 밭 2만4000평과 노비 8가구와 금대와 말 2필을 하사받았다.
서기 1418년에는 장흥군이 되어 이회영과 함께 명나라 사신으로 건너가 <조선>이란 국호를 받는 큰 역할을 감당해 태종이 친히 낙천정(자양동 소재)에서 잔치를 배설한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렸다.

세종 때 마천목이 모친을 모시려 벼슬을 사양했으나 왕이 녹봉지급을 계속하라고 명했고 모친상을 당하자 부의로 쌀과 콩 20석,종이 일 백권 등을 하사했다는 기록도<조선왕조실록>에 실렸다.

세종 11년 장흥군을 장흥부원군으로 올린 내용도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되고 세종 13년 서기 1431년 별세하자 충정공(忠靖公)시호가 내리고 3일간 조회를 중단하고 영의정으로 추증했다.

좌명공신녹권을 후손들이 서울의 고궁박물관에 기증하고 2006년 4월 보물 1469호로 지정되고 2011년 전시회를 통해 일반에 공개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충정공 마천목에 대하여 평하기를 ‘도량이 크고 깊으며 천성이 순수하고 재능이 뛰어나다’라고 하고 ‘군왕의 우익(右翼)이요 국가의 주석(柱石)이다’라고 최대, 최고의 찬사를 하고 있다.

후손중 의병, 3.1운동 등에 참여해 옥고를 치른 분이 90여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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