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에서
폐허에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7.26 16: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방학동안 짬을 내어 터키와 그리스를 다녀왔다. 철학을 업으로 삼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일종의 성지순례인 셈이다. 알다시피 최초의 공식적인 철학자인 탈레스가 터키 서남부의 밀레토스(고대에는 그리스의 식민도시)를 무대로 활동했고, 최고의 저명 철학자인 소크라테스, 그리고 그 후계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의 아테네를 무대로 활동했었기에, 그곳을 둘러보는 것은 지금까지 내게 하나의 숙제로 남아 있었다.


그 현장에 내 두 발을 디뎠을 때 확실한 어떤 감동이 다가왔다. 아 이곳 어딘가를 그들도 걸어 다녔겠구나. 바로 이곳에서 철학이(자연과 인간에 대한 지혜의 희구가) 피어났었구나. 그런 감동. 어디선가 그들의 강론이 육성으로 들릴 것 같은 생생한 현장감이 있었다.

그런데 좀 묘했다. 그런 감동의 한편으로 전혀 다른 어떤 감상이 물밀 듯이 밀려온 것이다. 탈레스의 밀레토스도, 소크라테스의 아테네(특히 아고라)도 지금은 한갓 폐허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유적이라고도 부른다. 무너진 지붕, 쓰러진 기둥, 나뒹구는 초석들….
그뿐만이 아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에페소스도, 그리고 철학과는 무관하지만, 고대문명이 찬란히 꽃피었던 트로이, 페르가몬, 페르게, 그리고, 코린토스, 미케네, 크레타의 이라크리온 등등도 모두 다 그저 폐허였다.

7월의 뙤약볕 아래서 그 폐허의 길들을 걸으며 내게는 많은 상념들이 스쳐갔다. 무엇보다 인상적으로 가슴에 다가온 것은 이런 것이다.

이 대단한 문명들도 결국은 이런 쇄락의 길을 걸었다는 것. 인간의 것 치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 무상, 변전, 허무, 그리고 이른바 니힐리즘. 그런 모든 것이 곧바로 가슴에 다가온 것이다. ‘모든 것은 흐른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도 그 현장에서 곧바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또 하나 묘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저 아득한 고대의 유적에 지금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인간들의 ‘삶’의 흔적이 있더라는 것이다. 거기엔 목욕탕도 있었고, 화장실도 있었고, 도서관도 있었고, 병원도 있었고, 극장과 경기장도 있었고, 그리고 당연히 길과 가게들도 있었다. 에페소스에는 심지어 유곽도 있었다. 그리고 박물관으로 옮겨진 수많은 연장들, 식기들, 장식품들…. 지금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인간의 ‘생활’이, ‘삶’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거기엔 역시 지금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인간들의 의식주, 생로병사 그리고 희로애락이, 그리고 사랑과 미움,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문헌들이 알려주는 대로 거기엔 또한 권력과 재물과 명성에 대한 지향, 투쟁, 그런 것들도 있었다. 그 폐허의 규모와 화려함, 그리고 유물들의 수준(세련된 디자인과 정교함 같은 것들)은 그런 것들의 배경효과로 충분한 것이었고, 더욱이 기원전 몇 백 년, 심지어 기원전 이천 년, 삼천 년 같은 까마득한 숫자는 그러한 인간들의 삶이 시공간을 초월한 어떤 보편적인 ‘진리’의 일부임을 여실히 알려주는 것이기도 했다.

변해버린 것 속에서 드러난 그 변하지 않는 것들. 나는 그런 것을 때로는 ‘본연’, 때로는 ‘진리’라는 말로 규정해왔다. 철학자들의 눈을 그런 ‘변하지 않는 것들’을 바라본다. 거기서 어떤 ‘의미’를 읽어내고자 하는 것이 다름아닌 철학자인 것이다.

나는 이천 수백 년의 세월을 건너 21세기의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여행을 떠나기 전의 생활이 다시금 펼쳐진다. 사람들과 세상은 여전히 일상의 욕망들과 뒤엉켜 분주하게 돌아간다. 몇 천 년 후가 될까. 언젠가는 이곳도 폐허로 남을지 모르겠다. 그때 저 먼 어떤 나라에서 여행 온 어떤 중년의 철학자는 이곳에서 무엇을 보게 될까. 그도 역시 변해버린 것과 그 속에 남은 변하지 않는 것들을 보게 될까? 미래의 그가 보게 될 그 유적 속에 지금의 우리는 과연 무엇을 남기게 될까. 아파트, 티비, 자동차, 스마트폰은 그를 감동시킬까? … 다 좋지만, 위대한 철학의 전통이 무색하게 지금 온 세계를 걱정시키고 있는, 저 현재의 그리스처럼 한심한 역사의 그림자 같은 것은 남기지 말았으면 좋겠다.

자동차의 정신없는 소음 속에서 한 순간 저 폐허의 고요가 그리워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