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적과 경주양동마을
이언적과 경주양동마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7.28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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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이언적(李彦迪)은 1491년생 호는 회재(晦齋), 본관은 여주 아버지 번(蕃)과 문신 손중돈의 누이와 결혼 처가인 경주 양동으로 이사하여 낳은 아이가 이언적이다. 이때 부터 경주손씨와 여주이씨가 모여 살았으며 이곳이 명당자리로 집안이 번성하여 116명의 과거 합격자가 났다. 양동마을은 신분에 따라 집들의 배치가 높은 곳은 양반 낮은 곳은 하인의 집으로 둘러 쌓여있다. 손중돈에게 도움을 받아 이언적은 23세에 소과에, 24세에 문과에 급제 벼슬을 시작, 31세에 홍문관, 인동현감 등 지방관리를 지냈고 성리학을 가르칠 정도로 학문에 열정적이었다. 1527년 세자를 가르쳤는데 나중에 인종이 되었다. 1530년 사간원 사간이 되었고 이후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는데 6조의 참판과 판서 한성판윤 성균관과 사헌부의 우두머리를 지냈다. 인종은 왕이 되어 우참찬과 좌찬성을 주었으나 명종이 왕이 되어 상황이 반전 외척간의 싸움으로 을사사화 때 판의금 부사였던 이언적은 사화를 막을 수 없었다.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 등으로 이언적은 평안도 강계로 유배 63세의 나이로 객지에서 죽는다. 퇴계 이황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와 함께 동방4현으로 추모 문묘에 배향 최고의 영애를 받았다.


경주양동 마을은 조선시대 집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마을 전체가 주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어 있다. 값으로 정할 수 없는 집들과 유물이 남아 있다.

가장 중요한 유물로 세종때 찍어낸 책 중국의 역사를 기록한 “통감속편” 국보 제283호와 손소의 초상인 손소영정(보물 제1216호)가 있다. 집중에서도 보물이 3채가 있다. 관가정(보물 제442호)은 손중돈이 세운 집으로(곡식이 자라듯 자손이 자라는 모습을 본다는 뜻), 향단(보물 제412호)는 이언적의 동생 이언괄의 손자 이의수의 호를 딴 가옥으로 그 집안의 종택으로 원래는 99간인데 6.25때 불타서 56칸이 되었다. 무첨당(보물 제411호), 이언적의 아버지 이번이 지은 집이다.

무첨당은 이언적의 손자인 이의윤의 호인데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하라는 뜻 옛 사람들의 유산이 여러가지 남아 있는 양동마을은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2010년 8월에 세계문화 유산이 되었고 이언적의 후손들 역시 그곳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다.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572년 옥산서원을 건립 현판은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와 김정희의 글씨를 볼수있다. 이언적이 거쳐했던 독학당(보물 제413호)이 있다.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에 가면 우리 전통 한옥의 멋을 느낄 수 있고 마을 안에는 유물전시관이 있어 손씨와 이씨 두 집안의 역사와 귀중한 유물들도 만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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