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만남에는 반드시 이별이 있다
모든 만남에는 반드시 이별이 있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8.24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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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이별이라는 뜻에는 여러 가지의 단어가 있다. 고별(告別):이별을 알림. 작별(作別):서로 이별함. 결별(訣別):기약 없는 작별. 석별(惜別):이별하기를 애틋하게 여김. 생별(生別):생이별. 사별(死別):죽어서 이별함. 이라고 국어사전에서 풀이하고 있다.

모든 만남에는 반드시 이별이 있다. 만남의 본질은 이별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인간의 생(生)과 사(死)가 둘로 나누어지는 게 아닌 것처럼 만남과 이별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만남을 너무 기뻐한 나머지 이별이란 것을 깜박 잊고 살아가고 있다.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다가 때가 되면 느닷없이 나타나는 게 이별의 본성인 것을 우리가 잊고 있다.

그러다가 정작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면 두렵고 고통스러워 눈물을 흘리게 된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이별 그 자체가 또 다른 만남을 잉태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므로 진정한 의미의 이별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러한 이별에는 이별하고자 하는 이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된 이별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죽음을 통한 이별은 다르다. 그것은 새로운 만남을 위한 이별도 아니고 이별하게 되는 양자의 의지가 반영된 이별도 아니다. 결코 원하지 않지만 기어이 찾아오고야 마는 무섭고 두려운 형태의 이별이다.

죽음을 통해 이별하고 나면 또 다른 만남은 있을 수 없다. 설혹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 의미는 사뭇 다르다. 죽음에는 영원한 이별만 있을 뿐이다. 즉 이별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글을 쓰면서 나 또한 내 자신의 죽음도 생각해보고,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도 생각해 보게 된다.

죽음을 통한 이별은 만나고 싶을 때 만나지 못한다는 데 특별함이 있다. 오해로 일시적으로 소원했던 사람은 오해가 풀리면 다시 만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혼을 했다가 재결합하는 경우도 있다. 몇 십 년을 생사조차 모르고 살아오든 남북의 이산가족도 세월이 흘러서 다시 만나게 된다. 아무리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아무리 찾아가고 싶어도 찾아갈 수 없는 게 바로 죽음이다. 내가 죽고 나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보지 못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나면 내가 그를 보고 싶을 때 그를 보지 못한다. 때로는 이 세상에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분들은 이 세상에 없다. 인제는 아무리 보고 싶고 만나고 싶어도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다시 만날 수 없는 분들이다. 다시 또 다시 생각해 보아도 이별은 우리들 삶의 일상이자 본질이다.

시인 한용운은 〈님의 침묵〉에서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고 했으며, 박목월은 〈이별의 노래〉에서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라고 했으며, 이형기는 〈낙화〉에서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했으며, 도종환은 〈이별〉에서 ‘당신이 처음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는 이것이 이별이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내 안에 있고 나 또한 언제나 당신이 돌아오는 길을 향해 있었으므로 나는 헤어지는 것이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꾸 함께 있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이것이 이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라고 했으며, 이해인은 〈이별의 노래〉에서 ‘떠나가는 제 이름을 부르지 마십시오. 이별은 그냥 이별인 게 좋습니다.’라고 했으며, 가수 패티김은 〈그대 없이는 못 살아〉라는 노랫말에서 ‘그대 없이는 못살아 나 혼자서는 못 살아 헤어져서는 못살아’…라고 노래했다.

‘천년을 함께 있어도 한 번은 이별해야 한다.’는 중국의 중운지휘선사(重雲智暉禪師:873∼956))가 이별의 슬픔에 우는 제자 언초에게 읊은 게송(偈頌)이 우리에게 위안을 주고 있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 너 없이는 못 산다더니 너 때문에 못 산다고 한다. 너무 쉽게 변하는 냄비 사랑들이 참으로 안타까운 세상이다. 변함이 정의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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