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아저씨
김씨 아저씨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8.25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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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설가

김씨 아저씨는 우리 동네 아저씨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김씨 아저씨가 조금 모자란다고 말들한다. 내가 우리 동네에 산 지가 20년이 넘었다. 그 동안에는 김씨 아저씨가 안 보이더니 올 여름에 눈에 띄기 시작했으니 이사 온 지가 요 근래인 것으로 짐작된다. 한 번 눈에 띄기 시작하니까 자주 보이고 자연히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됐다.


내가 처음 이사 올 때만 해도 우리 동네는 절대로 가난한 동네가 아니었다. 더러 젊은 사람들이 아파트를 장만할 돈으로는 부족해서 우리 동네 작은 ‘빌라’를 얻어 신혼을 차리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대개 노인들이 살고 있는 가난한 동네로 전락했다. 비교적 젊은 사람이 들어온다고 해도 어찌 어찌 하다가 형편이 어려워져서 오게 되는 가난한 동네가 되었다. 그런 젊은이들은 젊다고는 해도 사오십대다. 이삼십대 사람들은 이사를 왔다가도 금새 도로 이사를 가버린다.

이런 우리 동네에 이사를 온 김씨 아저씨라도 예외일 수는 없다. 오십대 초반의 나이에 척 봐도 형편이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형편이 좋지 않다는 건 여러 가지로 아주 쉽게 알게 된다. 내가 김씨 아저씨가 형편이 어렵다는 걸 안 건 택배 때문이었다. 나는 오후 잠시 짬을 내 알바로 택배를 하는데 김씨 아저씨 집에 택배를 갔다. 문을 한참 두들겨서야 안에서 누구요? 라며 아주 퉁명스러운 반응이 왔고 또 한참을 있다가 문이 열렸다. 김00가 이 집에 삽니까? 라고 물었는데 이 김씨 아저씨는 예? 라고 반문만 했다. 다시 한 번 그런 사람이 사느냐고 다그쳤다. 반문을 몇 번을 더하고 멀뚱멀뚱 불안한 표정으로 한참을 쳐다보다가 하는 말이 우리 아들인데.....였다. 나는 살다 살다 별 멍청한 사람을 다 보겠다고 속으로 짜증을 내며 택배 건을 던지듯 주고 내려와버렸다.

그 후 김씨 아저씨는 거의 매일 보였다. 이에 김씨 아저씨로 부르기로 했다. 특별히 하는 일도 없으면서 그냥 동네를 돌아다니는 듯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김씨 아저씨가 골목어귀의 쓰레기더미에서 뭔가를 뒤적이고 있었다. 용케 라면 세 봉지를 찾아들고는 좋아서 입술을 귀에다 걸고는 자기 집쪽으로 달려가는 걸 보고야 말았다. 아마 누군가 유통기간이 지나서 버린 것이겠지. 그래서 김씨 아저씨가 형편이 어려운 줄 알았다. 이후 냉동고에 얼려 둔 먹꺼리가 있으면 건네주곤 한다. 무얼 줄 때마다 주저않고 받아가서 오히려 내가 고마울 지경이다. 그리고 지나가다 눈에 띄면 안녕하세요, 라고 예사롭게 인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안년하세요, 라고 하는 발음 비슷한 말로 답례를 한곤 한다. 직접 묻기도 하고 관찰하기도 해서 차츰 그에 대해서 알아간다.

그는 수원 어딘가에서 회사를 다니다가 우리 동네로 최근에 이사를 왔고, 지금은 회사는 왜 안 다니는지는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지금은 누나와 조카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내가 택배를 가서 본 그 사람은 아내가 아니고 한 살 위인 누나라고. 누나는 또 남편의 구타를 못 견뎌서 따로 산다고. 그리고 김씨 아저씨는 말이 어눌하고 심하게 더듬는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뇌가 생각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입으로 발성해서 말을 한다. 그런데 그는 그게 잘 안 되는 것이다. 김00가 여기 사느냐고 다그쳤을 때 그래서 그렇게 대답이 느렸던 것이다.

말이 어눌하고 심하게 더듬는 것이 지금엔 회사를 다니지 않는 것과 상관이 있을 것이다. 저렇게 말이 어눌한 사람을 채용할 회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회사에 다니는 중에 어떤 충격적인 사고를 당한 게 분명하다고 짐작할 뿐 직접 묻지 못하겠다. 애써 잊혀지고 있는 상처를 들춰내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아서. 수원에서 회사를 다녔다면 수원에서 계속 살았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거긴 대기업이 있으니 아무래도 생활비를 벌기가 쉬울 것이라 짐작되어서다. 하면서도 뭔가 내가 모르는 사정이 첩첩이 쌓였겠거니 짐작한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내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느 수퍼가 가장 싸느냐, 세탁소는 어디가 잘 하느냐, 미장원은 어디가 잘 하느냐, 같은 이것 저것 소소한 부탁을 한다. 김씨 아저씨도 내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라는 걸 대번 알아본 모양이다. 며칠 전에는 일할 데가 없느냐고, 뭐라도 해야한다는 말을 했다. 물론 나는 난감하고 안타까웠다. 어딘가 모자라 보이고 말은 더듬고 어눌한 사람을 누가 일을 시키려할 것인가. ‘노가다’도 소정의 교육을 받고 그 교육증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요즘이다.

이래저래 고민이다. 분노가 일 정도로 고민되는 건 능력위주의 우리 사회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고 생각들다가도 정부는 어떻게 할 수 있어야 되지 않을까? 특히 우리 동네엔 이렇게 생활비를 벌 형편이 못 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을 위한 복지를 적극적으로 이뤄가야 하지 않을까? 언제까지 해당 가정, 가족에게만 그 책임을 지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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