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벼 개발(開發)과 녹색혁명
통일벼 개발(開發)과 녹색혁명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9.15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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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식량의 자급자족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요구되던 60년대 중반 식량자급을 내건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농촌진흥청과 서울대 농대교수 허문회 등 합동으로 연구에 들어갔다. 동양에서는 필리핀에 미작연구소가 있어 이곳에서 일년미를 계속 연구하였다. 처음 교배종으로 일년에 3기작을 할수 있고 밥맛은 없으나 수확량이 많은 안남미(安南米)를 모계로 일본미를 부계로하여 667번째 교잡 끝에 만들어낸 이 기적의 쌀은 병충해에 강했고 단위당 수확량도 많았다. 문제는 끈기가 없고 퍼석퍼석해 맛도 없었으며 냉해에 약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해 새로운 통일계 품종이 속속 등장했고 이로 인해 6년간 풍년이 이어져 산업화도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다.


통일벼는 일반벼의 절반의 크기이기 때문에 잘 쓰러지지 않고 수확량이 월등하게 많아 한국 녹색혁명의 견인차가 됐다.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단점이 나타났는데 못자리에서 싹이 터지 않아 고민했고 벼가 붉게 변해 걱정했으며 맥없이 떨어지는 낱알 때문에 울었지 교배조합과 실증시험 등 거쳐 단점을 보완하여 맛 좋고, 병에 강한 품종 출현으로 농민들의 웃음이 돌고 정부에서는 많은 수매량으로 창고가 가득 가득하여 1991년 통일벼는 농가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80년대말 통일벼는 비실거리던 모가 잘 자랐고, 도열병에 강했으며 타작때 벼가 엄청나게 쏟아져서 웃었지. 이렇게 통일벼가 세 번 울리고, 세 번 웃겼지. 식량문제를 해결할 저력을 통일벼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였고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달려들었던 민관의 절박함과 획기적인 기술개발이 다시 요구된다는 뜻이다. 통일벼를 농가에 보급하는데 일선 전 공무원은 노고가 많았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풍요로운 밥상을 가능하게 만든 현재진행형의 꿈이 동시에 미구(未久)에 닥쳐 올지도 모를 식량 전쟁에 대비하는 정신적 유산이요 교과서이기도 하다. 1975년부터 유신, 밀양 23호, 수원 264호, 소풍 등 통일벼 신품종이 개발 보급되면서 1977년 부터 쌀의 생산이 풍년이 되어 세계 최고 다수확 국가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밥맛이 떨어지는 통일벼의 단점을 보완하면서 수확량도 많은 신품종이 개발되었지만 1992년도 정부의 수매 중단으로 농촌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앞으로 통일이 되면 대북지원을 할수 있도록 종자만을 보존하고 있다. 1994년 우루과이 협상 타결후 농업정책이 ha당 75만원씩 농업 보조금을 정부에서 지급하여 농민을 다독거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함께 세계 최대 수입국으로 쌀 자급율이 86%에서 지금은 30%대로 무너졌다. 한해 쌀 소비량이 일인당 67㎏으로 식습관이 선진국으로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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