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아~ 가을이다!
와아~ 가을이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9.16 18: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영/소설가

어김없이 여름은 가버렸네, 속절도 없이......... . 그리고 가을이 나를 사로잡아버렸다. 용빼는 재주도 없이 반짝이는 가을 햇살 아래 섰다. 손에는 포도 한 송이를 들고 산책을 한다. 포도 한 알을 입안에 넣고 톡 터뜨리면 온 입안에 단물이 번진다. 이 감사함이라니!! 다른 어떤 계절보다 가을햇살 아래 나무 이파리들이 더 선명하다. 내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왜 그토록 선명하고 빛나는지 알았다. 참 둔한 ‘대그빡’이다. 계절이 바뀌면서 태양과 지구가 만나는 각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여름에 비해 건조한 습도도 한 몫 한다.


가을, 참 좋은 계절이다. 추석을 일러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하여라. 가을엔 기도하게 하소서....... 이런 모든 속언들에 공통으로 들어가 있는 마음이 감사와 만족일 것이다. 누군가 심어놓은 봉숭화 연분홍 꽃잎이 환장하도록 곱다. 흘깃흘깃 누가 보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 꽃잎에 입맞추고는 혼자 키들키들 웃는다. 그 옆에 상사화의 대궁이를 슬쩍 건드려 본다. 지난 봄에는 상사화 보는 재미도 굉장했는데.

초봄에 가장 먼저 화단에 싹을 내미는 꽃이 저 상사화다. 그리고 초여름까지 잎이 좀 심하다 싶을 만큼 무성하다. 화단을 시퍼렇게 다 차지한다. 그러다 제법 굵은 여름비가 내린 다음날 그 비를 핑계대고 무성한 이파리들이 푹 쓰러져버린다. 또 그러다 어느 순간 잎이 흔적도 없이 녹아 금새 흙이 된다. 그 흙을 거름 삼아 이번엔 꽃대궁이가 올라온다. 더 정확히 말하면 꽃봉오리가 그 흙을 뚫고 세상밖으로 나온다. 꽃대궁이는 흙이 된 이파리의 키 만한 키로 자란다. 그리고 연한 보라색 꽃을 피운다. 잎은 꽃을 못 보고 꽃은 자신의 잎을 못 보니 상사화다. 왠지 슬프다.

상사화 옆에 맨드라미가 진한 꽃자주색으로 씩씩하다. 줄기가 붉은색 도는 갈색으로 키까지 땅딸막해서 참으로 강건하다. 맨드라미는 저렇게 눈이 오는 겨울에도 저 꽃자주색을 유지하며 굳세게 핀다. 어릴 때엔 부채꼴 모양의 꽃을 통째로 잘라서 손바닥에 대고 탁탁 틀면 좁쌀보다 더 작은 까만 씨가 오소소 떨어진다. 그게 재미 있어서 화단의 맨드라미는 죄다 꺽어 작살을 냈다가 아버지한테 열나 맞았다. 그러고 보면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는 꽃을 좋아하셨다. 어디든 갖고 싶은 꽃이 있으면 주인 몰래 ‘분양’을 받아오곤 하셨는데. 심성이 고우셨던 거지.

말난 김에 나는 아버지를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평생 술과 담배와 노름으로 세월을 보냈다. 온밤을 그 짓들로 새우곤 새벽에 들어와선 하루 종일 사랑방에 누워 빈둥거렸다. 반듯하게 누워 자는 것도 아니고 꼭 엎드려 누워 있던 생전 당신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 어렸을 때 내 할머니가 아버지를 데리고 개가를 해서는 아이 둘을 낳고 설사병으로 돌아가셨다. 의붓할아버지는 내 아버지를 소처럼 부려먹곤 이십대 초반에 내쫓았다. 아마도 아버지는 그 일이 인생의 상처로 남아 그 상처를 술로 달랬고, 나중엔 술이 아버지를 폭행한 것이다. 안타깝고 가엾다. 그러자, 가을이니 이제 아버지를 용서해드리자. 용서하는 징표로 아버지가 못다산 몫까지 철저히 살아야겠다. 돌아가신지 어언 삼십 년이지만 이제라도 용서하니 이 가을이 더욱 감사하다. 슬프도록 감사하다.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더욱 치열히 살아가야지!!!

논 모롱이를 돌아 걷는다. 나락 잎이 아직 초록이 더 짙지만 곧 익어가는 노란색이 짙어질 것이다. 자세히 보니 벌써 벼잎 가장자리가 누릿누릿 하다. 고향의 들판에도 가을이 한창이겠다. 그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지. 저렇게 들이 넓은데 우째 내 거는 한 골도 없으꼬. 그 어머니는 지금은 내 것 아닌 남의 들판도 못 보고 알콜 중독으로 병원에 갇혀 지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서둘러 아버지가 하던 나쁜 짓을 노름 빼고 다 하셨다. 참 인생이 뭔지, 기가 찰밖에. 추석엔 어머니를 뵈러 간다. 가슴이 아프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더니 머리카락 속으로 스며들어 간지럽힌다. 뇌까지 간지러워 나는 또 키들키들 웃는다. 눈물이 놀라서 뚝 그친다. 하늘이 말갛다. 구름도 여기 있다고 고운 여인의 흰 목도리 같은 긴 구름이 한 쪽으로 흐른다. 하늘이 어찌 저래 파랗게 보이는지. 저 하늘을 손바닥에 감촉하기 위해 새처럼 날아가 봤으면.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이란 걸 알지만 하늘을 감촉하고 싶은 이 욕망 또한 끝이 없으려나 있으려나.

바람이 선선하다. 콩밭에 콩이파리 흔들리는 소리가 마치 가랑비 오는 소리 같다. 마지막 한알을 마저 따먹은 앙상한 포도줄기를 콩밭에 보태주고 코스모스 핀 오솔길로 접어든다. 오래 알고 지내는 문우가 코스모스는 너무 하늘하늘 유혹해서 싫다고 했다. 나는 그때부터 더 코스모스를 사랑한다. 무슨 억하심정인지. 크크, 그래도 코스모스는 좋네. 흔들려서 더 좋네. 찬바람이 불어닥치려면 아직 두어 달은 남았다. 두어 달, 이 얼마나 소중한 가을인가. 일각을 여삼추로 살아야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