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가을, 일본의 한 장면
2015년 가을, 일본의 한 장면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10.15 16:08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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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관련학회의 초청을 받아 약 일주일간 일본을 다녀왔다. 동북지방인 센다이, 그리고 관동인 도쿄, 이치카와를 거처 관서지방인 오사카, 니시미야, 교토를 가로지르며 학회참석과 세 차례의 강연을 소화했으니 꽤나 강행군을 한 셈이다. 저쪽 관계자들은 1년 전부터 수차례 메일을 주고받으며 철저하게 준비를 했고 마지막 날 공항에서 배웅의 손을 흔들 때까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 계획을 완수했다. 10년 세월을 일본에 살며 그런 일본을 너무나 잘 아는 터였지만 저들의 철저함에는 새삼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첫 방문지인 센다이는 ‘숲의 도시’ 답게 초록이 풍성했다. 지난 2011년 쓰나미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지만 만나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그 악몽이 잊을 수 없는 교훈으로 남아 있는 듯했다. 어디엔가 보이지 않는 방사능이 도사리고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생활은 평온하고 충실해보였다. 누군가는 사진전을 열었고 누군가는 요리를 했고 누군가는 정성껏 손님을 맞이했다. 또 누군가는 고성에 올라 시가지를 내려다봤다. 표면상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나는 그곳 학문의 중심인 도호쿠대학에서 ‘한국과 일본에서의 하이데거연구’에 관해 소상한 논의를 전개했다. 저들은 눈빛을 반짝이며 그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한국의 만만치 않은 연구성과와 최근의 동향에 대해 적지 않은 자극을 받는 듯한 눈치도 없지 않았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확실한 자랑거리를 만들어준 선배 철학자들, 그리고 동료와 후배 학자들이 참으로 고맙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수적으로 확인된 일본의 그것은 한국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저들은 그 연장선에서 지금도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센다이의 공원거리는 아름다웠고, 인근 마츠시마의 절경은 더욱 아름다웠다. 그리고 강연 후에 이어진 간친회의 요리는 시각적으로나 미각적으로나 거의 예술이었다.

두 번 째 방문지인 이치카와에서 나는 유학시절 은사님의 성묘를 했다. 일본의 묘들이 다 그렇지만 가족단위의 납골묘이다. 묘비명은 은사님의 친필이었다. 일본은 시내 곳곳에 위치한 사찰에 묘지가 부속돼 있다.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큰 묘지의 형태였다. 자택에서 기다리던 사모님은 일부러 기모노로 성장을 하고 남편의 옛제자를 맞이했다. 최고급의 식사와 술로 점심접대가 이어졌다. 응접실의 가구배치는 놀랍게도 35년 전 유학시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분은 누렇게 변색한 35년 전의 노트를 꺼내며 그간의 방문기록 일부를 읽어주셨다. 일본의 놀라운 기록문화를 다시금 실감했다. 작별인사 후 역까지 택시를 탔다. 백발의 운전수는 택시 좌석의 새하얀 시트커버보다도 더 깔끔했고, 그리고 정중했다. 법규준수와 안전운전은 물론 기본이었다.

세 번째 방문지인 오사카에 숙소를 정하고 이튿날 고베 인근의 간세이학원대학에서 ‘존재론의 사유화’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유럽같은 분위기의 캠퍼스는 방문자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학회에는 뜻밖에 100명이 넘는 학자들이 운집했다. 강연의 분위기는 뭐랄까, 진지함 그 자체였다. 나는 30년의 교수생활에서 그런 분위기를 별로 느껴보지 못했다. 백 수십 개의 시선이 나라고 하는 하나의 초점으로 모아졌다. 단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는 그 긴장감. 그건 보람이기도 했다. 아마도 ‘한국인의 강연’이라는 것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나름의 자부심으로 그 내용을 채워나갔다. 저들의 반응은 감동적이었다. ‘홀린 듯이 들었다’ ‘일본이 잊어버린 제대로 된 철학’ ‘일본인보다 더 훌륭한 일본어’ 등등, 듣기 거북할 정도의 찬사가 귀를 간지럽게 만들었다. 저들의 소위 ‘다테마에’일지도 모르겠으나, 나의 정성, 혹은 수준에 대한 응답 내지 평가라는 인상이 없지 않았다. 그것은 고마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강연 후의 간친회는 화기애애했다. 술자리에서도 ‘질의응답’은 진지했다. 가게 한쪽 구석에서는 주방장이 최고의 정성으로 닭꼬치를 굽고 있었다. 각자 자기 몫의 회비를 계산해 내고 헤어졌다.

네 번째 방문지인 교토에는 때마침 3연휴로 엄청난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기모노 차림의 아가씨들과 함께 군데군데 천 년 전의 모습들이 드물지 않게 펼쳐져 있었다. 구경거리는 넘치고 넘쳐 짧은 시간에 그 100분의 1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교토대학 관계자의 접대는 정중하고도 융숭했다. 고맙게도 시내 한복판의 전통여관을 숙소로 준비해줬다. 이름 높은 그 대학에서 나는 ‘궁극의 철학’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강연이 1시간 질의응답이 1시간이었다. 이건 발표자가 거의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대충 때우는 형식적 행사가 아니었다. 제대로 된, 본격적인 학문적 토론이 이어졌다. 특히 젊은 신진학자들의 반짝이는 눈빛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나는 국적을 떠나 그들에게 학문적 어드바이스를 했고, 그들은 가슴 깊이 그 말을 새기는 듯 했다. 강연 후 요리집에서의 간친회는 천년고도의 분위기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예술적인 요리와 술은 이 강연행사의 화룡점정이었다. 천년의 고찰들은 밤이 되자 화려한 불빛으로 재단장을 했다. 그렇게 그들은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날 밤, 도쿄의 국회의사당에서는 이른바 ‘안보법안’이 강행 통과되었다. 일본은 그렇게 또다시 전쟁가능한 국가로 탈바꿈했다. 저쪽 관계자의 한 사람은 데모대의 선두에서 가두연설을 하고 왔노라 했다. 아끼는 후배교수 한 명은 미국에 의해 주어진 일본의 어설픈 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미래의 일본에 대해 깊은 우려를 토해내고 있었다.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2015년의 일본은 아직 푸르렀다. 그 푸르름 속에 저들의 친절과 철저한 준비와 융숭한 대접과 진지한 토론과 그리고 강행처리의 의사봉 소리와 데모대의 고성과 혐한을 부추기는 우익의 음모와 맛있는 요리와 아름다운 야경…, 그 모든 것이 다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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