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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의 식생활 문화최진상/경남과학기술대학교 식품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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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0.18  17:5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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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일상들은 변하는 것 같으면서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변하는 것이 이치(理致)인가 보다. 식생활 변천의 역사를 더듬어 현재 우리가 가진 것이 어떻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세계식생활문화(수학사)를 통해 조명해보자. 새로운 먹거리 소재 개발이나 아이디어에 도움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5세기경 로마의 멸망과 함께 중세가 시작되었다. 500~1050년경까지 중세 초기는 유럽의 역사에서 침묵의 시기로 불리며 물질적, 지적 성취수준이 극히 낮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의 유럽 농부들은 빵, 죽, 초본식물, 구근식물이 일상의 식품 목록이었다. 초본식물로는 양배추, 시금치, 양갓냉이, 순무의 순이 대표적인 것이고, 구근식물로는 순무, 무, 양파, 부추, 당근 등이 주재료였다. 그 외에 도토리와 너도밤나무 열매를 이용하여 돼지와 닭을 사육하였고, 사냥을 통해 토끼를 잡거나 생선을 이용하였다.

로마 멸망 후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은 로마에서 사용하던 리쿠아멘과 아위 등의 양념 사용이 어려워졌으며, 숯 풍로가 개발되고 프라이팬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목재가 풍부한 지역에서는 가마솥을 붙박이로 걸어두고 다양한 식재료를 넣어서 묽은 수프나 고깃국을 만들었다. 이때 우유가 든 젤리 형태의 음식으로 껍질을 벗긴 밀에 우유와 설탕, 향료를 넣어 쑨 묵 상태의 죽에 고기나 채소 조각을 넣어 만든 프루멘티(frumenty)를 즐겨 먹었다.

성직자와 군주들은 대규모 영지를 가지고 식량을 자급자족하기 위하여 영지 내에 채소와 허브를 재배하였고, 묘지의 무덤 사이에는 유실수를 심고 축사를 지었다. 또한 양어장을 보유한 곳도 있었다. 그러나 9세기 중반부터 유럽은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침략과 맥각 중독, 녹병균의 감염 등으로 인하여 최악의 기근 시대를 겪었고, 그로인해 일부 식인(食人)풍습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중세 중기는 전성기에 해당한다. 서유럽의 세력이 부상하던 때이다. 이 시기에는 알프스산맥 북쪽의 농업발전으로 인하여 식량공급이 크게 증가하였고, 그로 인해 인구의 폭발적 중가와 더불어 마을과 도시의 부활이 이루어졌다. 농업발전 초기에 콩과식물과 다른 작물의 2부 윤작이 이루어지다가 북부지역에서 흙을 깊이 파낼 수 있는 보습쟁기를 개발하면서 생산성이 훨씬 높은 3부 윤작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경작방법은 동시에 말의 사용도 증가시켜 소 대신 말이 밭가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이렇게 땅을 경작하는 농부들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하였으며, 초기에는 암소, 돼지, 닭 등의 동물을 함께 사육하였다. 하지만 도시의 팽창과 더불어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도시에서 돼지의 사육금지 칙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도시의 팽창은 시장의 발달을 가져왔고 소규모 시장은 중요한 교역장소로 발전하였다.

시자의 발달로 인해 발전하게 된 상인조합 길드(guild)는 도시에서 외부인의 상업활동 금지, 획일적 가격행정, 독점 및 경쟁제한에 노력을 기울였다. 더불어 품질관리에서도 자체의 기준을 정하여 엄격히 지키도록 하였다. 도시가 성장하는 동안 일반 가정의 주방설비는 로마시대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편리하지 않아 ‘구운 고기 판매업자들’의 증가를 가져와 대중음식점의 시초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작은 위생기준의 면에서 볼 때는 매우 열악하여 도살장의 폐기물, 노점과 가정에서 버린 쓰레기들이 페스트(pest)의 번식지이자 잡식성 쥐의 서식처가 되었다. 이들은 페스트를 비롯한 전염병의 원인이 되어서 시장에서 쥐를 매개로한 페스트와 발진티푸스, 강물의 물고기를 매개로 한 이질과 파라티푸스, 조리한 고기와 행상인들의 손에 의한 식중독이 도시인의 생명을 위협하였다.

도시의 발달은 주변지역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증가와 평행을 이루었으나, 흉작이 되는 경우 영주나 경작인들이 곡물을 내놓지 않아 물자부족과 물가상승으로 곤란을 겪었다. 이에 따라 도시의 단체들이 당국과 상인 길드에 의해 세워진 창고에 다량의 곡물을 비축하기도 하였다. 다음에는 간단한 중세의 요리법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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