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누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10.25 17:4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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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동안 ‘누구?’라는 이 한마디를 두고 강의, 강연, 책, 논문 등에서 참으로 많은 말들을 해온 것 같다. 그만큼 이것이 철학적으로 중요한 주제라는 말이겠다. 저명한 시인 R씨는 “삶이 어떤 길을 걸어가든지 늘 그대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생각하라.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달아나지 말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철학자로서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얼마 전 모 학회에 다녀온 적이 있다. 거기서는 20세기 최고의 철학자 중 한 사람인 독일의 마르틴 하이데거가 도마 위에 올랐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지만, 그는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곧바로 나치에 입당했고 40대의 젊은 나이로 모교인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총장에 취임했다. 비록 당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으며 1년 후 자의로 그 직을 그만두고 이후 오히려 당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고 그 자신은 변명하지만, 그 전력으로 해서 종전 후 대학에서 해직되는 등 심한 고초를 겪었다. 어중간하게 복권이 되기는 했지만 그 전력은 평생토록 그를 괴롭히는 멍에로 작용했다. 그의 사후 장황한 변명의 사전 인터뷰가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으나 그것이 면죄부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그의 탄생 100주년이던 1989년을 전후로 그의 나치 전력이 또다시 전세계적으로 문제가 되었고 좀 잠잠해지나 했더니 최근 그가 쓴 소위 {검은 노트}가 전집의 일부로 공개되면서 또다시 그 시비에 불이 붙은 것이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평가는 반반으로 갈라졌다. 그를 매도하는 쪽과 옹호하는 쪽으로 양분되는 양상인 것이다. 독일 내부에서의 평가는 엄혹한 편이다. 바로 이 문제가 계기가 되어 프라이부르크대학은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 대학의 하이데거 관련 교수직 자체를 아예 폐지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 양반이 그 당시 독일에 팽배했던 반유대주의에 일부 동조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유대인이었던 그의 스승 후설과의 관계, 유대인인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고 그 때문에 고초를 겪었던 선배 철학자 야스퍼스와의 친교, 역시 유대인이었던 제자 한나 아렌트와의 ‘수상한’ 혹은 ‘부적절한’ 관계, 한스 요나스 등 걸출한 유대인 제자의 배출, 등등을 생각해보면 그의 반유대주의는 뭔가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그 자신이 주저인 {존재와 시간}에서 그토록이나 ‘누구’(Wer)라는 주제를 강조하면서 ‘현존재’니, ‘세계내존재’니, ‘세인’이니, ‘죽음을 향한 존재’니 하는 것을 해명한 것은 크나큰 업적으로 평가되지만, 그가 이곳저곳에서 ‘민족’(Volk)이라는 것을 언급한 점은 그의 뛰어난 철학적 역량을 생각해볼 때, 좀 어설픈 감이 없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사실은 역설적으로 하나의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을 반영한다. 하이데거 역시 역사적-사회적 상황 속에서 삶을 영위했던 한 사람의 ‘독일인’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1차 대전 패배 후의 국가적-민족적 곤궁 속에서 그 역시 ‘퓌러’(지도자)인 히틀러 총통에게 기대를 걸고 그에게 은연중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결코 가볍게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지극히 구체적인 ‘누구’의 내용 중 일부였던 것이다.

진실은 그런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의 ‘누구임’은 다면적이다. 동일한 그가 위대한 철학자이기도 하고, 동시에 평범한 한 사람의 독일인이기도 하고, 자상한 아버지이기도 하고, 어설픈 바람둥이이기도 하고, 병약한 환자이기도 하고, 열렬한 스키광이기도 한 것이다. 그 어느 것도 그의 ‘누구임’에서 제외될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곧잘 부분을 전체로 판단하는 착각에 빠져들곤 한다. 어느 한 면에서 뛰어난 사람은 다른 모든 면에서도 뛰어날 것이라는 선입견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건 참으로 바보같은 생각이다. 한 사람이 여러 면에서 뛰어날/모자랄 개연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모든 면에서 뛰어난/모자란 인간이란 애당초 존재할 수 없다. 공자, 부처, 소크라테스, 예수 같은 위대한 성인들도 예컨대,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는 완전 꽝이었음을 상기해보라. 요즈음의 최대 덕목인 ‘돈벌이’에서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분들이 이럴진대 일개 교수였던 하이데거인들 어찌 모든 면에서 뛰어날 수가 있었겠는가. 그에게 어설픈 면모가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이다. 하나의 ‘과’(過)를 가지고 열의 ‘공’(功)을 뭉개버리는 것은 신이 아닌 인간에게는 좀 과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열의 ‘공’ 때문에 하나의 ‘과’가 ‘과 아닌 것’이 되지 않는다. 그것을 그냥 덮어도 좋은 것은 절대 아니다. ‘과’는 과대로 명백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엄격한 ‘구별’은 언제나 필요한 철학적 덕목의 하나인 셈이다. 따라서 평가라는 것도 당연히 양면적-균형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공은 공으로 과는 과로 각각 따로따로 평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공과 과에 대한 평가가 어설프게 치우치면서 한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가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패가 갈려 싸우기도 한다. 그 패라는 것도 실은 ‘누구’의 한 부분이다. 눈을 똑바로 뜨고 그 실상을 잘 헤아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은 누구인가. 그는 누구인가. 아니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적어도 백 명의 당신, 백 명의 그, 백 명의 내가 있다. 그게 바로 우리, 인간인 것이다. 공이든 과든, 한 면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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