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 총량제
행운 총량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11.01 14:47
  • 3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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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TV를 보다가 어떤 드라마에서 우연히 ‘행운총량제’라는 말을 들었다. ‘지랄총량제’ ‘재주총량재’ 등이 유행하더니 이번엔 행운총량제? 한 순간 ‘반짝’하는 재미를 느꼈다. 사람에게는 각자 주어진 행운의 총량이 있다는 가설이다. 확인될 수 있는 진리는 아니겠지만, 이 가설은 사람들에게 나름의 지혜로 작용할 수가 있을 것 같다. 예컨대 지금까지 행운이 그다지 없었거나 혹은 불운이 많았던 사람이라면, ‘그래, 앞으로 남은 행운이 많을 테니까...’ 하면서 희망을 가질 수가 있고, 반대로 지금까지 행운이 아주 많았거나 특별한 불운이 없었던 사람이라면, ‘그래, 그것만 해도 어디야. 정말 복 받은 인생이었어...’ 하면서 과욕과 오만을 경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건 둘 다 일종의 지혜임에는 틀림없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불운에 좌절하는 사람도 많고, 행운에 우쭐대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들은, 자기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둘 다 바람직스러운 것은 되지 못한다.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이란 그리고 인생이란 참 묘해서 절대로 모든 것이 똑같지 않다.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래서 재미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재미는 어쩌면 신의 창조의도에 내재된 건지도 모르겠다. 모든 인간의 삶이 천편일률적이라면 만유의 주인인 신께서도 무료하실지 모르니까. 자연의 변화무상함도 또한 그래서 그런 것이다.) 나는 나의 ‘인생론’에서 그것을 ‘인생의 원천적 불평등 혹은 불공정’이라고 개념화했다. 그건 단순한 사실을 넘어 진실이라고까지 말할 만하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엄중한 진실이다. 삶의 조건은 정말이지 사람마다 다 다르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다 다르다. 누구는 재벌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누구는 가난뱅이의 자식으로 태어난다. 누구는 잘생긴 얼굴로 태어나고 누구는 못생긴 얼굴로 태어난다. 누구는 천재로 태어나고 누구는 돌대가리로 태어난다. 요즘 유행하는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말은 그런 현실을, 엄연하고도 엄중한 현실을, 반영하는 말이다. 태어난 이후의 삶의 진행과정에서도 그런 불평등 불공정은 여전히 진리다. 지지리 운이 없어서 하는 일마다 쪽박인 사람도 있고, 반대로 운이 너무나 좋아 하는 일마다 대박인 사람도 있다. (실제로 연달아 로또에 당첨되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까 그건 타고난 운이라고 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다.) 이런 불평등 내지 불공정의 최고의 상징은 어쩌면 저 ‘손금’이나 ‘사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행불행이 다 운명이고 팔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딴소리 말고 그냥 그렇게 살다 죽으라는 것이다. 이런 건 정말이지 왜 그런지 원천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이걸 설명하는 기막힌 이론이 하나 있기는 하다. 저 인도 사람들이 말하는 ‘업’ ‘업보’ 그리고 그와 짝을 이루는 ‘윤회전생’이 그런 것이다. 팔자가 좋고 나쁘고 운이 있고 없고 그런 건 모조리 다 전생의 업장에 따른 현생의 업보라는 것이다. 이건 현생의 업장이 내생의 업보로 발현된다는 식으로 계속 이어진다. 인도사람들, 정말이지 머리가 좋아도 너무 좋다. 어떻게 이런 기막힌 생각을 하게 됐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저 모든 불공평, 불평등이 일단 설명이 되는 것이다. ‘다 니가 한 짓 때문이야.’ ‘그러니 남 탓하지 말어.’ 특히 지배자들에게는 너무나 편리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인도 사람들은 이런 걸 확고하게 믿는 모양이다. 아득한 옛날이지만 대학생 때 내 은사 중 한분이 1년간 인도에서 연구년을 보내시고 돌아온 직후 인도철학 수업시간에 들려주신 이야기가 있다. 당시 인도에는 빈부 차이가 너무 극심해 일종의 지적 호기심으로 길거리의 한 거지에게 이런 질문을 해봤다는 것이다. “당신 이렇게 고생고생 살아가는데, 저기 저 으리으리한 저택에 사는 부자들, 높은 사람들 보면 원망스럽다는 생각 안 드세요? 비슷한 사람들끼리 단결해서 타도하고 싶다든지...” 그랬더니 그 거지가 정색을 하고 펄쩍 뛰면서 말하더라는 것이다. “예끼 여보슈 그런 큰일 날 소리 하지 마슈. 저런 분들이야 다 전생에 선업을 많이 쌓아서 지금 저렇게 잘 사는 것이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다 전생의 업보로 지금 이렇게 못 사는 건데, 어쩔 수 없잖소. 지금 그걸 모르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으면 그게 또 악업이 돼서 다음 생에는 이만도 못한 축생이나 버러지로 환생할 지도 모르는데, 나더러 그러라는 말이요?” 그 사람의 말이 너무 진지하더라고, 그 선생님 역시 너무너무 진지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게 정말로 그런지 어떤지, 그거야 누가 알겠는가. 행운의 총량이 정말 있는지 어떤지 그것도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재미난 생각임에는 틀림없다. 어쩌면 현생의 그 행운총량이 사람마다 엄청 다르다 해도, 그래서 원천적으로 불평등 불공정하다고 해도, 다음 생, 그 다음 생, 또 그 다음 생, 그 모든 윤회의 생들을 다 합쳐 평균내보면 모든 사람의 행운이 다 엇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든 또 달리 생각하든 어차피 짧은 한 세월 살다갈 거, 불운을 탓하며 우거지상으로 사는 것보다야 밝은 얼굴로 사는 것이 남들 보기에, 그리고 신이 보시기에도 훨씬 나은 것은 아닐까.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딸에게 조언해 주었다. “대학에서 이런저런 면접을 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밝고 명랑하고 기운차고 긍정적인 아이가 더 좋은 인상을 주더라. 긍정적인 게 부정적인 거보다는 여러 모로 훨씬 더 나은 거란다.”

내가 지금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요즘 우리나라 돌아가는 꼴을 보면 정말 답답하기가 이를 데 없다. 속된 말로 ‘운발’이 너무나 받쳐주지를 않는다. 하지만 국운이 그렇더라도 한탄만 하지는 말자는 거다. 우리 역사가 지금까지 지지리 궁상으로 이어져 왔으니 저 행운총량제에 따른다면 이제부터 남은 행운이 더 많을 수도 있지 않은가. 희망을 갖고 긍정적으로 살아간다면 저 높은 곳의 신께서도 좀 더 좋은 점수를 주시지 않을까? 그러니 우리 기운을 내자. 길은 아직도 미래로 뻗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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