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젊은 세대들에게는 유행가 제목 정도로 가볍게 들릴지 모르지만 기성세대에게는 가슴 아픈 추억이다. 우리나라가 온대 몬순 기후하에 놓여있는 지역으로는 먹을 거리를 일년에 2번 거두어 들인다. 봄에 씨앗을 뿌려 가을에 수확하면 추곡(秋穀)이라 하고 가을에 씨를 뿌려 초여름에 생산하면 하곡(夏穀)이라 한다. 추곡은 종류도 많지만 하곡은 보리와밀 정도인데 추곡에 비해 종류도 적고 단위 면적당 소출도 적다. 논 서너마지기에 여러 식구가 목을 매달고 있는 처지인데 여름내내 꽁보리 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부지런히 농사지어 벼를 수확하였으나 빌린 생계비를 갚기 위해 시장에 내다 팔고 장리쌀 갚고 나면 남는게 별로 없다. 겨울동안 점심은 고구마로 때우고 금싸라기 아끼듯 쌀을 아꼈으나 구정이 지나고 꽃피는 춘삼월이 오면 쌀 뒤주는 바닥이 드러나고 종자용 벼와 조상 제사상에 올리려고 할머니가 감추어둔 쌀만 남게 된다.
이른 봄 먹을것이 없어 봄나물로 연명할 때 보리 새순을 뜯어다가 보리 쌀과 섞어 밥도 해먹고 죽도 끊여 먹었다. 보리 익을 무렵이면 보리 추위에 중늙은이 얼어 죽는다는 속담도 있었다. 그러나 낮에는 무척 덥기도 하였다. 보리 수확때는 눈코뜰새 없어 얼마나 바빴는지 장인 어른이 와도 엉덩이로 절할 틈도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요즘은 콤바인으로 순식간에 수확은 해치운다. 또 살기 어렵기 때문에 아이나 노인들이 들판을 다니며 보리이삭을 줍기 위하여 남의 논에서 이삭을 줍기도 하였다. 초근목피로 연명할 때 어려운 산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였다.
보리는 한때 주식과 다름없는 곡식이다. 풋보리가 나면 쩌서 말려 찧으면 식량으로 대체할 수 있음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풋보리가 날때까지 견뎌야 했다. 그러나 보리가 수확될 때까지 어려운 시기를 보릿고개(麥嶺)라 불렀다. 농사규모와 식구수에 따라 한많은 보리고개가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하다. 오죽 했으면 가족의 수는 먹는 입의 수 즉 식구(食口)로 헤아렸을까 보릿고개를 넘기려면 비싼 장리쌀을 내든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해 나가야 하니 얼마나 끔찍 했으랴. 이 보리고개는 1970년대 와서 없어졌다. 기적의 벼 통일벼 즉 녹색혁명이 일어나 개발되어 수확량이 많아짐으로 농촌의 풍요를 가져왔고 외환 사정이 좋아져 외국에서 식량을 수입해서 먹었다. IMF 위기를 극복하자는 의미로 “보릿고개 아시나요?” 라는 말이 유행이 되고 있다가 사라졌다. 그야말로 세상은 돌고 도는가 보다. 우리네 풍속에서 아름다운 하나의 사례로 기억될 가치가 있는 어려운 시대 보릿고개를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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