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2017-09-20 03:55:33
경남도민신문
뉴스 지역 시민기자 기획 오피니언 커뮤니티 LIFE 알림 게시판 포토
오피니언강신웅 칼럼
중국 경제(中國經濟)의 특성(特性)강신웅/국립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교수·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장·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
경남도민신문  |  gndm1000@daum.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5.11.15  18:07:17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지난번에는 중국의 금융(金融)의 전개과정(시대별 화폐의 종류와 세금징수 과정 등)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시간에는 중국 경제의 특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중국이 경제적으로 전근대적인 체제를 담보하면서 오랜 빈곤에서 해탈하지 못했음은 아직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상고(上古)에서 중고(中古)까지 적어도 16세기까지의 경제는 결코 낙후(落後)되지 않았다. 일찍이 주(周)대에 벌서 공전제도인 정전(井田)의 실시, 철기의 이용, 도시의 형성, 중앙권력의 안정, 경작술의 발달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주기적인 기황(飢荒)과 제도의 개혁으로 어려움은 많았지만, 16세기까지도 마르코-폴로에게 동양의 황금지대라는 절찬을 받을 정도로 발전을 거듭한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가 일직선의 성장을 보지 못하고 침체한 것은, 중국 경제 자체의 특성이 저해를 가져왔지만, 문화적 · 철학적 배경이 이를 조성한 것이다. 우선 중국의 경제사는 자체적으로 정치의 심한 영향 밑에서 일관성 있는 정책을 유지 못하고 많은 기복을 노출했다. 토지제도가 공유와 사유(私有) 사이를 여러 번 배회했고, 상업이 억상(抑商)과 휼상(恤商)의 양단을 왕래했고, 과세와 부역이 통치자에 따라 경중(輕重)의 폭을 번복하였고, 화폐가 금속과 지폐 사이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동안 경제는 정치의 시험지처럼 청황(靑黃)을 달리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천연적으로 항상 수재와 한재, 정치적으로 외침과 내란 등의 내우외환(內憂外患) 때문에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고, 사회적으로 토호와 부농 · 부상들의 횡포 속에서 소농과 소상 · 소작농 · 노비 계급들은 성장의 계기와 의욕을 상실해 왔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중국적인 경제 특성이 오랜 시일을 두고 형성되었다.

그것은 경제가 다만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하기 위한 소극적인 수단으로 전락되었고, 이 가운데 자급자족(自給自足)이란 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물론 지대물박(地大物博)한 소치도 있겠지만, 생활 위주의 소시민적 사상이 보다 작용한 것이다.

이런 경제체제는 몰락되지 않은 상태에서 현상 유지를 말함이나, 절대적인 인구가 농업에 종사하고, 또 농업 인구 중에 절대적인 호구가 소농이며, 그 계급에 속하는 국민이 많은 농한기(農閒期) 속에 유유한 세월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극적이고 답보적인 경제는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하루를 따지면 결손을 보지만 일년을 따지면 저축을 본다’라는 중국적인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다음으로 문화와 철학이 심어 준 사대부(士大夫) 관념이 경제의 낙후를 초래했다고 본다. ‘논어’에 이른바 ‘선비는 남루와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거나 ‘나물 먹고 물 마시며 팔뚝을 괴고 생활할지언정 불의로운 부귀를 외면한다’거나 ‘뽕나무 800주와 박전 15경(頃)이면 자손 살림도 넉넉하다’는 등의 거의 반(半)종교적인 청백(淸白)사상을 선비의 지조로 삼았는가 하면, 옛적엔 상공업을 작간범과(作姦犯科) 정도로 천시했고, 기술자를 비천(卑賤)한 사람으로 백안시했던 것이다.

이래서 중국인은 누구나 창백한 선비를 선망했고, 선비가 되지 않거나 선비를 그만두면 농부로 돌아감으로써 소득증대를 스스로 포기했다.

어느 민족보다 산판(算盤)에 밝던 중국 민족이 상업에 낙후되었고, 금속의 개발에 앞섰던 민족이 공업에 뒤졌고, 하(夏)대에 농경을 시작했던 민족이 농업에 후진한 것은 자기민족과 안빈(安貧) · 극기(克己)의 가치관념과 자손만당(子孫滿堂)하고 효우목인(孝友睦婣)하면 그만이라는 인생관에다가 넓은 땅과 유구한 역사에 대한 자대심리(自大心理)가 작용한 탓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농업에는 춘추전국시대부터 토호들에세 농지를 매점당한데다가 과중한 조세(租稅)와 부역, 그리고 대외 무역량이 적은데다가 자본의 유통이 잘 안되면서 도량형(度量衡)과 화폐가 획일(劃一)되지 않은 것이 공업엔 모든 역대를 통하여 원시적인 수공업에 답보하면서 단위적이며 폐쇄적인 생산과정을 탈피치 못했던 것이 각각 그 원인이 되고 있다.

1949년, 체제의 공산화와 함께 집단 생산체제로 획일화되었으나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뒤, 다시 책임생산(責任生産)같은 농사 청부제가 생기고, 상품의 개인 매매가 늘어 다시 중국의 전통적인 사유제로 되돌아감이 주의할 만 한 내용이다.

< 저작권자 © 경남도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경남도민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회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ㆍ고충처리인
경남 진주시 동진로 143   |  대표전화 : 055)757-1000  |  팩스 : 055)763-22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정창효
Copyright 2011 경남도민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gndomin.com
본사이트에 게재된 모든기사의 판권은 본사가 소유하며 발행인의 사전허가 없이는 무단전재 및 복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