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력 잃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빛을 찾아주고 싶다
시력 잃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빛을 찾아주고 싶다
  • 글/한송학·사진/김상목기자
  • 승인 2015.11.17 18:32
  • 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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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생명광명회 김기원 회장

 
새생명광명회 회장, 국가원로회의 원로위원,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차학회 고문, 철학박사, 시인, 수필가 등 김기원 회장이 하고 있는 일은 많다. 이 중 김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사회에 봉사하는 일이라고 했다. 특히 심장병 어린이를 돕고 시력을 잃은 분들의 눈을 치료해 주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김 회장이 만든 단체에서 심장병 수술을 받은 어린이만 100명이 넘고 눈환자 500명 이상이 무료로 치료를 받았다. 자신을 ‘사회봉사 잡부’라고 부르는 김기원 회장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값을 하고 죽어야 하는데 내가 해야 하는 사람값은 남을 돕는 것”이라며 “그래서 이런 일들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할 것이고 내가 해 온 일들을 또 누군가는 계속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김기원 회장과의 인터뷰이다.

-현재 맡고 있는 일들은 무엇인가
▲새생명광명회 회장을 비롯한 경남과학기술대학교 명예교수, 향토생활문화연구원장, 한국차학회, 한국공무원문협 고문,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경남펜위원회 부회장, 한국문협, 부산문협, 황령문학, 진주문학 회원, 한국문학21협회 부회장, 민족통일운동본부 공동대표, (사)한국차문화학술원장, 한국문학신 경남본부장을 맡고 있다.

-새생명광명회는 어떤 단체인가
▲소재지는 진주시 강남동 1-14번지이다. 창립은 1989년 청교련 부설 감로심장회 결성이라고 할 수 있다. 1994년 110명 어린이심장수술 성공 법인 분리됐으며 1994년 안과 전문봉사단체 새생명광명회가 창립된 것이다. 1999년 법인을 설립했다. 2000년에는 보건복지부지정 각막, 장기이식등록 등의 기관으로 지정됐다. 부설 기관으로는 새생명장애인후원회, 시력무료검진센터, 새광명사랑회, 지구촌사랑나눔운동본부가 있다. 봉사팀은 전문교수고문팀, 안과전문교수팀, 안경나눔봉사팀, 시력검진팀, 침술봉사팀, 개안수술지원팀, 이미용봉사팀, 다문화상담팀, 홍보문화봉사팀, 사랑나눔팀, 수리봉사팀, 헌혈홍보팀, 장기기증접수팀, 노래봉사팀, 문학교류팀이 있다.

▲ 새빛사랑나눔 봉사의료단이 진주시 내동면 신광마을 주민들 의료봉사 후 기념촬영을 가졌다.
-새생명광명회 설립 동기는 무엇인가  
▲새생명광명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감로심장회에서 심장병 어린이 수술을 하는데 당시 병원에 가면 눈환자가 너무 많았다. 당시에 안과가 별로 없었는데 시력을 잃은 사람들에게 빛을 찾아주고 싶었다.

-광명회 소속 회원은 몇명인가
▲현재 전국에 1200여명 정도가 도움을 주고 계신다. 환자들이 아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회원이다.

-회원은 어떻게 모집했나
▲전국에 조금만 알거나 지인이 알거나 또 지나가다가 좀 있어 보이는 사람이거나 무작정 도와달라고 했다. 새생명광명회의 취지를 말해주고 도움을 달라고 했다. 사기꾼으로 오해도 많이 받았다. 이렇게 해서 1200여명의 회원들이 도움을 주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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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병·안과 질환자 무료치료
전국 1200명 회원들 도움으로
현재 500명 이상 눈 수술 받아 

진주문화원 문화대학원 학장 
명예교수·문학 등 다방면 활동
대통령 표창 등 수상경력 화려 

힘든 어린시절 후 자수성가 다짐
스스로 만드는 복은 좋은일 실천
나의 평생 사람값은 ‘남 돕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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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생명광명회 수혜자들은 몇명인가

▲현재 500명 이상이 눈 수술을 받았다.

▲ 소외계층 무료개안 수술 후 함께한 모습.
-감로심장회는 어떻게 만들었나
▲1990년 진주의곡사에서 심장병 후원회인 감로심장회가 만들어졌다. 전신은 연화사의 불교학생회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불교학생회의 한 학생이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 학생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모금활동을 한 것이 계기가 됐다. 또 이 이야기가 불교신문을 통해 전해졌고 독지가와 스님 등이 동참하게 됐다. 수술비는 한번에 500만원~600만원의 큰 돈이 들어가는 수술이었다. 지금은 절에서 운영을 잘하고 있다.

-감로심장회를 왜 그만뒀나
▲억울한 일이 있었다. 경찰에 투서가 들어갔는데 제가 그 돈으로 밥 사먹고 술 사먹고 한다는 것이다. 심장병 수술을 하려면 사람의 피가 600~800cc가 필요한데 환자의 혈액형에 맞춰 3~4명에게 피를 뽑아야 한다. 피를 뽑으려고 하니깐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좋은 일을 하라고 권유도 하고 학점을 잘 줄 테니깐 헌혈을 하라고도 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고마워서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고 차비도 주고 했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된 것이다. 예산을 잘 짜서 돈을 써야 했던 것인데 당시에는 이런저런 생각보다는 심장병 환자의 수술만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경찰에서 어떻게 됐나
▲의도와는 다르게 방향이 빚나갔다. 그래서 남은 돈을 다 주고 제가 그만두게 된 것이다. 돈을 떼먹었다는 오해도 받았는데 은행에 돈을 빌려서 다 줘버렸다.

-사회봉사를 하게 된 계기는
▲불교의 영향이 아주 컸다. 어린시절 힘들때 절에서 몇일씩 묵곤 했는데 한 스님이 ‘의사가 되어서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 ‘불교를 믿는다’ 항상 두가지를 당부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저는 참 복이 없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수성가해야 겠다고 다짐했고 복을 스스로 만들자고 생각했다. 그 복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의사가 되어 남을 많이 도와주어야 겠다고 다짐했다. 의사가 되지는 못했고 그래서 감로심장회, 새생명광명회 등의 단체로 남을 도왔다.

-어린시절은 어땠나
▲1937년 10월 25일 부산 금정산 계명산봉 녹지산기슭 녹동 골이란 마을에서 출생했다. 녹동마을은 1960년 동래 골프장 조성으로 반강제로 뿔뿔이 떠났고 골프장에 취업한 분은 계속 산다. 진주와의 인연은 부친이 기름집을 경영했는데 아버지를 따라 9살 때 처음 왔고 이후 진주 친척집에 중학생, 고등학생 때 몇차례 다녀간 적이 있다. 가사가 기울어 1957년에는 8개월간 지리산 벌목꾼으로 일하기도 했다. 1958년에는 진주농과대학 수의하과에 입학을 허가 받았다. 수의학과는 군대를 수의장교로 가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법령 변경으로 수의학과 졸업 후 수의장교 임관이 불가능해 졌다. 그래서 대학을 유사학과인 축산학과에 입학하게 됐다. 축산학과도 적성 때문에 고민이 많았고 1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갔다.

-첫 직장은 어디였나
▲1963년 농협, 공무원시험에 둘다 합격됐는데 첫 직장은 농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계산기가 없는 시절 계산을 잘 못해 그만뒀다. 1964년 경남도청이 실시하는 교원순위 시험에 2등으로 합격 했고 진주농림고등학교 기호식물담당 교사로 같은해 6월15일 발령 받았다. 7월 1일에는 정식교사로 발령받고 자설나무자료를 수집했다. 이후 1966년 3월 진주농림고등전문학교 전임강사로 첫 강의를 시작으로 2003년 진주산업대학교 교수로 퇴직했다. 현재 경남과학기술대학교 명예교수와 (사)새생명광명 회장 향토생활문화연구원장, 진주문화원 문화대학장 등 사회봉사의 잡부로 활동하고 있다.

-문학의 시작은 언제인가
▲1967년 문학을 시작했다. 1994년에는 한국문학에 등단 했고 이후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한국문협, 부산문협, 경남시협,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겸 경남펜 부회장을 맡았다. 시집은 녹차빛 향기 외 5집이 있다.

-수상경력도 많은데
▲국민훈장 모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표창, 다촌문화대상, 명원차문화대상, 노천명문학 대상 등을 받았다.

-경남과기대 명예교수인데 어떤 강의를 하는가
▲농업발전사에 대해 특강을 한번씩 하고 있다.

-차에도 전문가인데
▲1956~1962년경 한국의 차민요 50여수를 채록해 한국차학회지를 통해 발표했다. 차 민요에 대한 학문적 정립의 토대를 마련했고, 차의 대가인 아인 박종한 교장, 김재생 교수, 효당스님과의 교류를 통해 차 문화의 발전에 기여해 왔다. 차 유적지에 대한 연구에도 관심을 기울여 한국 차 문화 유적지의 재조명에 이바지했고, 한국의 순수문학에 다도문학을 접목해 다도문학을 제창하기도 했다. 차, 다도, 차나무를 주제로 한 시집 ‘녹차 빛 향기’ 등 6집을 발간해 다산 정약용 이후 차도 시문학(茶道 詩文學) 발전의 선구적 역할도 했다. 1969년 진주다도회 창립에 기여했고, 1979년 한국차인연합회 창립에 참여해 18년간 감사직을 역임하면서 ‘다도지’를 발간했다. 1994년 한국차학회의 창립이사와 3대 회장을 역임하는 동안 한국차학회지를 통해 한국 차 문화의 학문적 정립과 한국 차 문화의 새로운 이론을 정립했다.

▲ 지난 4월 25일 눈시력검진세터를 창원부산진주에 시범적으로 개설했다.
-차의 영향은
▲어릴때 집에서는 아프면 차를 먹었다. 약보다는 차를 마시면서 몸을 회복했다. 그리고 대학 다닐때 아인 박종한 선생과 많이 어울렸다. 아인 선생에게 차와 고미술, 민화, 도자기, 목기 등 여러 가지를 많이 배웠다.

-진주문화원 문화대학원 학장을 맡고 있는데
▲문화원에서는 국조 단군에 관한 고대사와 차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청소년협의회도 만들었는데
▲1975년 진주시청소년협의회를 만들었다. 지금까지도 각 학교별로 문학협의회가 있는데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문학을 통해 학생들은 지도한다는 계기 였다.

-배드민턴으로 활동하는데
▲요즘은 나이가 많아서 못한다. 1982년 진주시장기 배드민턴 대회를 만들었다. 진주시배드민턴연합회 초대회장을 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살아온 것들에 대해 정리를 해야겠다. 그리고 의식주 생활문화에 대해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게 물려줄 것이다.

-이런 일들을 하는 목적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물려줄 것이 무엇이 있겠나. 기록이다. 기록으로 역사를 남겨줘야 한다. 그래야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글/한송학·사진/김상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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