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류 혁명을 이룬 정천익 선생
의류 혁명을 이룬 정천익 선생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11.18 18:4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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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향토사학자

문충공 정천익(鄭天益)선생은 거란족을 평정한 공적으로 금자광록대부 진양부원군으로 추봉된 정신열(鄭臣烈)의 후손이다. 정천익 선생의 호는 퇴헌이며 공민왕 11년 11월 서기 1362년 대사성 김안리가 주관한 증보시에 급제해 공을 세우고 판부사(判府事)전객령(典客令)으로 치사했다.


본관은 진주. 판도판서를 지낸 정임덕의 손자이며 형제투금으로 교과서에도 실린 분으로 <고려사 열전>에 등재된 의조상서(判書)정유(鄭愈)의 아들이다.

정천익 선생은 1294년 경남 단성에서 태어나 음사로 중정대부 사재령을 거쳐 전객령을 지내다 향리에 정자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좌정언 문익점 사위가 원나라 남쪽 안남(베트남) 근거리에서 목면 씨를 발견하고 목면 씨를 몰래 가져와 장인 정천익 선생케 주었다.

정천익 선생은 공민왕 13년 봄에 씨를 심었으나 처음으로 재배하기 때문에 경종법을 몰라 문익점 선생. 정천익 선생 모두 실패하고 오직 정천익 선생의 씨 하나만 싹이 나와 다음해 진주와 산청에 배포했다.

10년 만에 전국으로 퍼져 온 백성이 칭송하고 임금이 불러 전후 사실을 물으니 목면에 관한 공적을 사위에게 돌리고 청원서를 올려 문익점을 복직케 했다는 것이다.

정천익 선생의 목면 시배지 단성 지역이 사적 108호로 지정되었고 사적관도 건립됐다. 진주성내 청계서원에 정선생의 영정을 모셨고 또 상봉동 1065-11번지 주택가에 면화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정천익 선생은 3남 1녀를 두었으나 모두 청요직에 기용되었고 정선생의 묘는 실전되었으나 향리에 신도비가 있다. 실을 빼고 실 뽑는 기계도 모두 정천익 선생이 창제한 것이라고 <고려사>에 기록됐다.

<조선왕조실록>태조 7년 6월 13일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사위 문익점이 가져 온 10여개 목면 씨앗 가운데 좌시중 이공수의 서장관이 된 문익점이 원나라에 갔다가 귀국하면서 목면 씨 10여 개를 가져왔다. 진주에 도착하여 전객령으로 치사한 정천익 에게 심게 했더니 한 개만 살았다. 가을에 백여 개를 수확해 향리에 나누어 주었다”

호(胡)의 스님 홍원이 전객령의 집에 머물 때 실을 뽑고 베 짜는 기술을 물어 종들에게 배우게 했다.

목면시배지 관리소(소장 이영복)에 의하면 금년에는 작년보다 더 많은 2만여 평의 목화밭을 조성해 홍보하니 전국에서 답사해 오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말한다.

진주시 진성면의 정용세(진주문화원 이사)님의 조상을 섬기는 지극한 정성에 감동해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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