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카르데시’ 피를 나눈 형제국 터키
‘칸 카르데시’ 피를 나눈 형제국 터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11.19 18:17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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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국학원 상임고문ㆍ한민족 역사문화공원 공원장

11월 15일부터 2일간 터키 남부 지중해 연안의 ‘안탈리아’에서 G20 정상회의가 열렸다. 우리의 대통령도 G20은 물론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아세안+3(한중일) 및 동아시아 정상회의(EAS) 참석을 위해 터키와 필리핀, 말레이시아를 잇따라 방문한다. 터키는 아시아와 유럽과의 경계인 최단거리 700미터에 불과한 ‘보스포러스 해협’을 끼고 있는 아시아 최서단의 국가이다.


우리들과 터키와의 생생한 기억은 2002년 6월 29일 밤8시부터 시작된 지구촌축제인 월드컵 3, 4위 전일 것이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이을용 선수, 송종국 선수가 1골씩, 터키는 하칸 선수가 1골, 일한 만시즈 선수가 2골을 넣어 우리가 석패하여 4위가 되었다. 그래도 즐거웠다. 월드컵에서 ‘4위가 어디냐’는 기분도 있었으나, 골은 넣은 터키 선수들의 이름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칸’과 가한, 간, 한은 같은 말이다. 징기스칸, 마립간에서 볼 수 있듯이 최고의 지도자요 우두머리를 지칭하는 말로 중앙아시아, 몽골과 우리말에서 공통으로 찾아 볼 수 있는 말이다. ‘한’역시 대한의 한이며 칸과 혼용되어 쓰고 있는 우리의 어원에 속한다. 그래서 터키선수 ‘일 한’이도 우리의 옆집의 아이 이름 같다.

다음으로 우리가 영원히 기억해야만 하는 고마운 일이 있었다. 바로 1950년 6.25동란에 터키가 조건 없이 참전하여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하여 피를 흘려준 일이다. 6·25에 참전한 유엔군 중 터키군은 네 번째로 많은 1만4936명으로 1005명이 전투와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165명이 실종됐으며, 2147명이 부상했다. 1만5000명 가까운 참전 군인의 상당수가 자원병이었다.

터키는 전후에도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입장을 변함없이 적극 지지하는 나라다. 비록 지리적으론 멀어도 역사 속에서 나눈 인연은 결코 가볍지 않다. 터키, 튀르크, 돌궐은 같은 나라이름이다. 중국과 돌궐(투르크, 터키)은 1300여 년 전부터 중국 북쪽과 서쪽 초원지대에서 끊임없이 충돌했다. 그때 튀르크와 우호 관계를 맺고 함께 중국에 대적했던 나라가 바로 고구려이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입술과 이’와 같았던 두 나라는 오래전부터 우방으로 지냈다. 고구려와의 관계에 이어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는 적지 않은 튀르크인과 방계인 위구르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았다. 이슬람 모스크(성전)도 지었고 이들을 ‘회회인(回回人)’이라 불렀다. 세종대왕은 이들의 쿠란(코란) 낭송을 즐겨 이를 ‘회회 조회’로 정례화 했다. 터키 역사 교과서는 이런 튀르크·고구려 관계를 설명하고 있고 터키의 웬만큼 교양 있는 사람이면 이 관계를 다 알고 있다고 한다. 터키어 어순(語順)도 우리와 비슷하고 그들에게도 몽골 반점이 있다. 터키 사람들은 한국을 '칸 카르데시‘ 곧 ’피를 나눈 형제'라고 부른다. 왜 피를 나누게 되었을까. 삶의 나침반인 철학을 같이 하였기 때문이다.

서기 698년 발해 시조 대조영은 나라를 건국하자마자 동생인 ‘반안군왕 대야발’에게 특명을 내려 불타버린 고구려의 역사를 복원하는 원대한 국책 사업을 벌인다. 이 거룩한 사명을 받은 ‘대야발’은 13년에 걸친 오랜 세월동안 ‘돌궐’을 2번이나 왕래하면서 천부경, 삼일신고를 위시한 옛 조선부터 이어져 온 한민족의 철학, 역사, 문화를 결국 복원한다. 서기 713년(천통 16년) 10월에 고왕 대조영은 <삼일신고>를 읽고 감동하여 이 책을 찬양하는 <어제삼일신고찬>을 짓는다. 이듬해 3월에는 ‘대야발’이 ‘고왕 대조영’의 명을 받들어 이 책의 서문을 쓴다. 좌평상사 겸 문적원감(현 교육부장관 격)인 ‘임아상’이 본문의 주해를 달았다. 발해 3세 ‘대흠무-문황제’의 대에 이르러 앞의 찬문, 서문, 본문 및 주해에다 고구려 개국공신 극재사가 쓴 <삼일신고독법>을 넣고, 책의 말미에 자신이 쓴 <삼일신고 봉장기>를 덧붙여 <삼일신고 어찬본>을 엮었다. 서기 739년(대흥 3년) 3월 15일이다. 문왕은 자신의 봉장기에서 예전의 석본, 단본이 세파에 소실된 것을 안타까워했고, 할아버지인 ‘대조영’으로부터 <삼일신고>를 전해 받은 뒤로 이 책을 잃어버릴까 봐 항상 근심하였다 한다. 당시 영보각에 봉장한 어찬본의 <삼일신고>를 태백산(현 백두산) 보본단 석실 속에 옮겨 보관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왜 이처럼 귀중한 우리의 철학과 역사를 머나 먼 ‘돌궐’에서 되찾아 복원했을까. 곰곰이 되새기고 또다시 찾아야할 우리들의 역사이다. 대통령의 터키 방문을 계기로 터키와 우리의 피를 나눈 역사적 관계가 다시 정립되기를 희망한다. 나아가 세계를 선도할 수 있는 위대한 철학인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공유하는 관계가 회복되고, 그 진실들이 역사교과서에 기록되기를 강력하게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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