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의 고고학
윤리의 고고학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12.03 18:48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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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ㆍ철학자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학문적 구상의 일단을 밝히는 것도 재미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이른바 ‘윤리의 고고학’을 제안한다. 거기서 윤리의 본질이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 필요성, 필연성, 절박성이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인터넷에 올라온 신문기사의 한 토막에 ‘회사의 인사 담당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지원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큰 괴리가 있다’는 흥미로운 보도가 있었다. 뽑히고 싶은 사람이 일반적으로 예상하는 것은 ‘능력 내지 스펙’인데 비해 뽑는 사람이 실제로 중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인성의 내용으로 ‘성실함’ ‘책임감’ ‘도전 정신’ 같은 것을 적시했다. 나는 ‘인성, 성실, 책임, 도전’ 같은 윤리적-가치적 단어들을 보면서 문득 이런 단어들이 과연 지금 여기, 즉 21세기의 한국에서 살아있는 단어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실제로 오래전부터 ‘인성’의 중요성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해왔는데 (예컨대 내가 근무하는 대학에서 나는 ‘인성클리닉’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도록 제안했고, ‘인성계발학’이라는 연계전공을 개설하기도 했고, ‘인성함양 교과개발’ 사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 TV 특강에서 ‘윤리의 권유’라는 주제로 이야기한 것도 같은 취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전혀’라고 할 만큼 그 반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그런 윤리적 가치를 체현한 인격자를 보는 일도 아주 드물다. 정말로 아주 드물다. 그리고 가끔씩 눈에 띄는 그런 사람이 세상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도 못한다.
좀 과장하자면 이런 윤리적 단어들은 우리 시대 우리 사회에서 이미 사어가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데도 또다시 이런 단어가 신문기사에서 언급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을 되살릴 절실한 필요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만큼 이런 기본적 가치들의 부재가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다는 반증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른바 ‘윤리의 고고학’ 같은 것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는 것이다. 인성의 기본이 되는 ‘윤리’라는 것이 실제로 생동하는 가치로서 사람들 사이에 통용되던 과거를 한번 근원적으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고고학이란 물론 땅속에 묻힌 과거를 발굴해내는 역사학적 방법론의 하나이지만 철학자 미셸 푸코가 이른바 ‘지식의 고고학’을 전개함으로써 그것은 철학의 방법론으로 그 영역을 확대했다. 간단히 말해 역사 속에 묻힌 지식의 과거를 발굴해내서 그 철학적 의미를 되새겨보자는 것이 지식의 고고학이다.)

내가 온갖 기회에 수도 없이 강조해 온 바이지만 우리 인간의 삶은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영위되는 것이기에 ‘윤리’ 내지 ‘윤리적 가치’는 그 삶의 질서 내지 질을 위해 필수적으로 요망되는 것이다. 그래서 윤리학자들은 그것을 ‘당위’나 ‘의무’라는 말로도 설명한다. 그것은 한때 분명히 어디에선가 살아 있었다. 우리는 그 흔적을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으로 그 근원을 밝혀내야 한다. 그 원천으로 가봐야 한다. 그것이 나의 학문적 착안점이다.

나는 그런 윤리적 가치들을 무작위로 한번 나열해본다. 인, 의, 예, 지, 신, 충, 효, 성(실), (공)경, 용(기), 겸(손), 명, 덕, 절제, 중용, 양보, 배려, 사랑, 자비, 정의, 정직, 충직, 불굴, 온유, 조화 ... 등등, 한도 끝도 없다. 정말 엄청나게 많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의 선현들은 왜 이런 것들을 그토록 강조했고 사람들은 왜 이런 가치들에 때로 그 인생을 걸기도 했던 것일까. 이런 가치들이 절실히 필요한 ‘경우들’ ‘상황들’ 혹은 ‘대상 내지 상대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런 가치들이 결여된 경우에 발생하는 ‘문제적 상황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불의, 부정, 불충, 불효, 불성실, 무책임, 무자비, 난폭, 비겁, 오만 ... 등등등) 그것은 지극히 구체적이고 실질적이다. (하버마스를 패러디해서 말하자면 윤리나 가치나 인성 같은 것은 ‘오직 실천적 맥락에서 정당성의 요구주장이 문제시 될 때 비로소 거론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문제들 및 가치들을 하나하나 면밀히 조사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은 한갓된 지적 놀음이 결코 아니다. 공자왈 맹자왈 하는 거드름이나 과시로 결코 끝날 일이 아닌 것이다. (인성에 탈이 난 채로 지식으로서의 윤리를 외치는 사이비 인사들에게 사람들이 혹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우리는 그런 단어들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런 가치들이 살아서 사람 사이에, 거리에, 생활공간에 떠다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 것들이 더 이상 돈 때문에 밀려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서 인성이 갖추어진 인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인간들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럴 때 윤리적 담론은 비로소 그 의미를 갖게 된다.
돈벌이를 본질로 삼는 기업이 인성을 중시한다는 것은, 만일 그것이 정말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다행스런 일이다. 나는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윤리의 고고학’을 제안하면서 지금 이 너무나도 비윤리적인 현실, 몰가치적인 세상의 추이를 관심 있게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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