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계획의 변천
가족계획의 변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12.08 18:5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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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온돌 입원실 산실(産室) 완비 / 조(趙) 산부인과”, “임산과 분만을 위한 상담 / 이(李)산부인과 / 입원실 있음”


1958년 신문 광고내용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5-1960년대 중반기까지 이어졌다. 베이비 붐은 광고란에서도 실감할 수 있다. 신문, 영화, 광고에 산부인과 광고가 제일 많았다. 1950년대 집집마다 아기들의 울음 소리가 끊일 날이 없어 베이비 붐 시기로 분만시에 산원(産院) 산파(産婆) 조산원 등 있으나 가정에서 분만했고 다산모 들에게 정부에서는 5월 8일 어머니날에 표창을 받기도 했고 조산원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조산대학까지 설립 학생모집을 했다. 정부는 1961년 대한가족협회를 발족하면서 인구제한 정책을 시작 본격적인 산아제한 정책을 폈다.

“덮어 놓고 낳다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는 점 표어가 말해 주듯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추진되었던 산아제한 정책은 1970년대에는 “아들 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로 바뀌었고 가족계획 확산을 위해 불임시술을 한 저소득가정 여성에게는 생계비 지원을 하였고 직장여성의 경우 두 자녀까지 유급휴가를 주고 셋째아이를 출산한 여성에게는 정부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남성의 경우 정관시술을 한 사람에게는 예비군 훈련을 면제시켜 줬다. 소득세 인적공제액을 자녀 두명으로 제한하였고 아파트 입주권도 불임시술자에 우선하여 공급했다. 보건소 등 종사 여직원들은 집집마다 방문하고 출장다니면서 피임약 피임기구(콘돔)을 나누어 주고 사용법을 가르쳤고 예비군 훈련장을 순회하며 정관시술을 권장하기도 했다. 소득수준이 높아지고 두 자녀가 일반화 했던 1980년대에는 “한 자녀 갖기”가 인구정책의 목표였다. “잘 키운 딸 하나 열아들 안 부럽다” 등 노골적으로 자녀 한 명만 낳기를 권장하였다.

1981년 의료보험에 피임 시술을 포함시키고 피임 시술을 받은 영세민에 생업자금 우선융자 등 인구증가 억제 대책을 펼쳐 1988년에는 인구 증가율 1% 목표를 달성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가족계획은 인구의 양적 관리에서 인구자질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고령화 사회와 노동력 부족 등 출산율 저하가 가져올 폐단이 예상되면서 줄기차게 진행해 오던 인구 억제 정책을 1996년에 폐지하였다.

2000년대 들어 출산기피 현상은 최고조에 달해 2005년 부터는 출산억제 정책에서 출산장려 정책으로 변화되었다. “아빠 혼자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 라는 표어가 정부에서 발표하였고 2005년 5월 18일부터 “저출산 고령화 사회 기본법” 을 제정 시행하였다. 다양한 출산장려 정책으로 출산율을 높이는데 힘쓰고 있으나 막대한 교육비와 맞벌이로 인한 자녀육아 등 현실적인 문제해결이 되지 않은 한 출산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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