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은 하나다
삶과 죽음은 하나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12.21 18:54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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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필자가 산책을 하는 코스 중에는 공동묘지도 있고, 삶의 마지막 의식을 거행하는 안락공원도 거치게 된다. 한 줌의 재로 승화하는 연기를 보면서 삶은 무엇이며 죽음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하고 질문도 던져보고 생각에 잠겨 보기도 한다. 이곳을 지나면서 뜨겁게 돌아가는 화로(火爐) 소리를 들으면서 숙연해지기도 한다.


순응이냐 거부냐? 죽음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두 가지 반응이다. 거부가 대세다.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인데도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기를 힘들어 한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는데도 ‘난 못가. 안 갈래’하며 버티는 사람을 보면 안타까움에 연민의 정이 든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삶에 집착하는 것이 여간 안쓰럽지 않다.

죽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제각기 다르지만 크게 보면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삶에 대한 미련이고, 또 하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미련과 두려움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숙명처럼 보인다. 아무리 단단히 마음을 먹어도 침착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인간이란 피조물의 한계가 아닌가? 부질없는 짓임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죽음이란 무차별 속의 차별이 아닌가? 죽음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빈자와 부자, 권력자와 민초들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성이 있다. 하지만 딱 하나, 죽음 앞에서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를 구별한다. 그게 바로 죽음에 대한 위대한 의미이다. 죽음의 위대한 의미를 이해하는 자는 죽음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들에게 죽음은 삶의 연장이고, 삶은 죽음의 연장이다. 죽음과 삶은 하나다. 하나인 동시에 둘이다. 삶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에서 하나고, 경계가 있다는 점에서 둘이다. 사람들은 편안하게 죽기를 원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편안하게 죽지 못한다. 공포와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는다. 잘 죽기를 바라는데도 고통 속에서 죽는다. 이유는 한 가지다. 잘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잘 살지 못한 사람이 잘 죽을 수는 없다. 역으로 잘 산 사람이 잘못 죽을 수도 없다. 잘 살면 잘 죽는다. 그동안 잘못해왔는데 결과가 잘 될 수는 없다. 삶은 대가이고, 죽음은 결과이다. 대가 없는 결과는 없다. 삶과 죽음에도 어김없이 적용되는 하늘의 법칙이다.

소크라테스가 감옥을 탈출하지 않고 오히려 독배를 기다렸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순응했던 성자였다.

중국 선종의 일파인 조동종의 창조인 양개화상의 일화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법문을 마친 스님이 대중에게 말했다. “난 오늘 갈라네.”,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그냥 갈라네.” 그러더니 법상(法床)에서 내려가 방에 들어가 앉자마자 그대로 돌아가셨다. 자기의 의지대로 죽은 것이다. 대중들이 스님의 시체를 잡고 울고불고 야단이었다. 네댓 시간이 지난 후 양개화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호통을 쳤다. “내가 갈 때가 되어서 가는데 뭘 그렇게 울고 야단이냐.” 그리고는 일주일간 더 법문을 하고 대중에게 다시 한 번 말했다. “이제는 내가 가도 되겠지.”가셨다.

‘레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는 “오늘 내가 사는 목적은 싸우는데 있다. 내일 내가 사는 목적은 이기는데 있고, 평생 내가 사는 목적은 잘 죽는데 있다.” 라고 했으며, ‘존재와 시간’의 작가인 하이데거는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일상에 매달려 사는 것이 보통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은 꼭 한 번은 죽어야 하니 우리는 정신 차려서 죽음을 직시해야 한다.”라고 했고, 영국의 지성인 버나드 쇼는 자신의 묘비명에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이들은 모두 죽음을 거부하지 않았다. 순순히 받아들였고 축제로 승화시켰다.

1969년 7월 24일 공화당 의원총회에서 ‘국민의 원성을 사고 있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이후락 대통령 비서실장을 경질하라!’31세에 정계에 입문해 8선을 지낸 이만섭 의원이 젊고 패기에 넘치는 37세 때 토해낸 사자후(獅子吼)였다. 현장을 도청하던 김형욱은 길길이 뛰며 이만섭을 암살하라고 지시하지만 미수에 그쳤다. 국회의장시절에는 안건 날치기 처리를 거부해 의장에서 물러나는 강단(剛斷)으로 권력과 돈 앞에 비루하지 않다. 평소에 존경하던 정치인 한 분이 지난 14일 83세를 일기로 가셨다. 이만섭 같은 정치인은 멸종되었는가? 안타깝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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