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과 위로
거절과 위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2.04 18:3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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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너무 가깝고 너무 흔하고 너무 뻔해서 주목받지 못하는 것들 중에 오히려 너무 너무 중요한 것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들이 많다. 땅이나 물이나 불이나 공기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보라. 존재 자체, 삼라만상을 비롯해 그런 것들은 한도 끝도 없다. 철학은 그런 것들을 새삼스럽게 조명해 그 숨어 있던 가치를 드러낸다. 나도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오랜 세월 그런 일들을 나름 열심히 수행해왔다. 거짓말, 도둑질, 폭력, 살인, 그런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다 그런 것이다. 존중하라, 용서하라, 사랑하라, 그런 것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런 사실들을 망설임 없이 ‘진리’로 규정해왔다. (내가 쓴 {진리 갤러리}도 말하자면 그런 진리단편집이다.) 물론, 요즘 사람들은 그런 언어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도,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진리는 끊임없이, 줄기차게, 영원히 누군가에 의해서 설파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런 진리들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들 중의 하나를 해보려 한다. 단적으로 ‘우리 인간들의 삶은 끝없는 거절들로 점철된다’는 진리다. 이를 ‘거절의 보편성’이라 불러도 좋다.

그렇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거절’을 경험한다. 어쩌면 우리, 모든 인간은 이 고생스러운 인간세상에 태어나 이 고생스러운 인생살이를 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출생시의 울음이 이를 상징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그런(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희망에 반해 ‘태어나고만’ 것이다. 그렇게 보면, 출생 자체가 일종의 거절인 셈이다. 그 이후는 어떤가. 거절은 절대로 우리를 떠나는 일 없이 걸핏하면 우리를 찾아와 우리를 괴롭힌다. (물론 거절은 내가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해온 대로, 우리 인간의 삶의 대원리 중 하나인 ‘욕망’ 내지 ‘욕구’에 대한 거절이다. 즉 바라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다.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거절은 욕망의 좌절과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엄마가 바빠서 제때 기저귀를 갈아주지 않는 것도, 젖을 먹여주지 않는 것도 일종의 거절이다. 아빠가 바빠서 같이 있어주지 않는 것도 일종의 거절이다. 친구들이 놀아주지 않고 나를 따돌리는 것도 거절이다.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은 다 거절인 것이다. 우리들의 지극히 구체적인 실제 인생역정을 되돌아보자. 우리는 실로 얼마나 많은 거절들을 당해왔던가. 학교에서, 하고 싶은 1등을 하지 못한 것도, 반장이 되지 못한 것도 거절이었다. 선생님의 관심을 받지 못한 것도 거절이었다. 내가 그린 그림이 교실 뒤 게시판에 내걸리지 못한 것도 거절이었다. 경시대회에서 혹은 달리기에서 아깝게 우승을 놓친 것도 거절이었다. 만화를 빌려보고 싶은데 엄마가 돈을 주지 않는 것도 거절이었다. 그렇게 거절은 조금씩 본격화된다. 중학생쯤이 되면 이런 거절들의 빈도와 크기가 달라진다. 입학시험에 떨어지는 거절도 있다. 그 아픔은 제법 크다. ‘그녀’ 혹은 ‘그’에게 보낸 연서의 답을 받지 못하는 거절도 있다. 그런 건 때로 식음을 전패하게도 한다.

하여간 이런 식으로 보면 그 이후의 거절들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는지도 대개 짐작이 간다. 어떤 이는 원하던 대학에 떨어지고 어떤 이는 취직에 실패한다. 어떤 이는 결혼도 하지 못하고 평생을 외로운 독신으로 지내게 된다. 어떤 이는 승진에서 탈락되고 어떤 이는 선거에서 패배하고 어떤 이는 사업에 실패하고 어떤 이는 전쟁에서 지기도 한다. 어떤 이는 아쉽게 금메달을 놓치고 어떤 이는 노벨상을 놓치고 어떤 이는 아카데미상을 놓치고 어떤 이는 실적이 떨어지고 또 어떤 이는 인기가 떨어지기도 한다. 또 어떤 난민은 국경을 넘지 못하고 어떤 대통령은 이웃나라 대통령의 냉대를 받기도 한다. ... 정말이지 한도 끝도 없다. 그런데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사실은 생로병사 자체가 다 거절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의사에 반해 늙고 병들고 죽어간다. 늙고 병들고 죽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우리 모두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늙어간다. 그 어떤 미남미녀도 이윽고는 다 추해진다. 누구나가 다 한번 이상 건강을 잃고 마침내는 죽음으로 내몰린다. 인생은 참으로 잔인한 게임인 것이다.

자, 그러면 어쩌자는 것인가. 이런 진실 앞에서 못난 사람들은 좌절하고 절망하고 때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인생이란 또 참 묘한 것이어서 거절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우리에게는 거절과 함께 그 거절에 대한 ‘위로’라는 것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거절당한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는 예술이나 동정이나 금욕 같은 것을 제시하는데, 그런 것이 거절에 대한 위로가 되어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경험을 통해 가장 구체적인 위로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뭐니 뭐니 해도 그것은 ‘사랑’이다. 젊은 예수가 그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더욱 구체적으로 그것은 ‘따뜻한 말 한 마디’다. 사람들은 그런 것에 뜻밖에 인색하다. 만일 그것조차도 어렵다면 말없는 미소, 혹은 따뜻한 표정, 눈빛 그런 것이어도 좋다. 결국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따뜻함이 거절로 인한 우리의 상처에 위로를 준다.

듣자하니 ‘이태백’이라고 청년실업이 여간 심각한 게 아닌 모양이다. 경제도 어려운 모양이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그 실업이라는, 궁핍이라는 거절로 인해 쓰라린 상처를 부여안고 있는 것일까. ‘위로’가 너무나 절실한 세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책임을 져야 할 정치하는 이들은 묘책을 찾지 못하고 그저 자신들의 이익에만 머리를 처박고 있는 양상이다. 제대로 된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도 총체적인 거절로 인해 상처받고 있다. 이런 건 도대체 어디에 가서 위로를 받아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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