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전규태
시인 전규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3.29 18:4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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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설가

오늘 내가 유일하게 소속되어 있는 문학모임에 다녀왔다. 엷은 황사기가 있기는 했지만 맑은 날씨에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백목련과 개나리, 그리고 아직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벗나무 사이로 달린 참 행복한 여행이었다. 고명하신 여러 시인과 작가들의 얘기도 듣고 주최측에서 초빙한 인사로 참석한 시인 전규태 선생님의 말씀도 들었다. 하나 같이 마음이 아프고 슬픈 얘기 끝에 기어이 희망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중에서도 전규태 선생님의 말씀은 참으로 귀하고 요긴한 말씀 같아 여기에 다시 적어본다.


우리는 올바르고 보람되게 살며 오래 장수하는 사람을 옆에서 보면 참 즐겁다. 사람이 저렇게 끝까지 보기좋게 늙어갈 수도 있구나 하는 희망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나도 저렇게 늙어가고 싶다는 의지가 향상되어 그런 모양이다. 그리고 나는 어릴 때부터 좀 이상한 일이 있다. 실현시키기 어려운 큰 일은 그 일을 해낸 당사자를 직접 만나서 애기를 나누고 나면 나도 그 일을 이룬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취직을 했다고 하면 나도 조만간 노력하면 큰 일을 성사시키는 식이었다. 그러니 올바르게 오래 장수하는 사람을 이웃하면 나도 그렇게 될 것 아닌가.

부자를 이르는 말에 ‘부유’ 라는 말이 있다. 또 뿌리없이 무게감도 없이 붕 떠있거나 날아다니는 걸 이르는 말에도 ‘부유’ 라는 말이 있다. 전규태 선생님은 자신은 무게감 없이 붕붕 할 일 없이 날아다녀서 췌장암이 걸렸어도 살게 되었다면서 말씀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스티브잡스의 얘기와 자신의 얘기를 비교해 주셨다. 잡스는 주치의가 하던 일을 마음껏 계속하라고 해서 암이 걸린 후에도 돈은 많이 벌어서 부유하게는 되었지만 죽게 되었다고 전해주어서 듣는 우리들도 함께 고개를 끄득였다.

전규태 선생님은 퇴직할 무렵에 어떤 사정으로 부채를 지게 되어 전재산을 탕진했다고, 그런데 췌장암이 걸렸다고, 업친데 덮친 격이 되었더라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말씀을 이어갔다. 그나마 퇴직금이라도 있어서 수술을 받았다. 살길이 막막한데 의사의 명령을 듣고는 더 앞이 캄캄했단다. 의사가 하는 말이 살고 싶으면 시를 쓰는 일을 포함해서 이제까지 하던 일은 모두 접고 구름에 달 가듯이 부유하며 살아라는 명령을 내렸다. 처음에는 정말 막막하고 절망적이었다고. 그리고 뜬 구름처럼 부유하며 살라니. 하도 기가 막혀서 의사에게 시인인 나에게 시를 쓰지 말라하면 무얼 하면서 살아야 하느냐고 반문을 했다.

의사는 전규태 선생님에게 핀둥핀둥 놀면서 정히 심심하면 그림을 그리라고 권했다. 살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십년을 그림만 그렸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3개월 이상을 살기가 어렵다는 췌장암을 극복하고 십 년을 살았고 앞으로도 최소 십 년은 더 살 수 있는 왕성한 건강을 회복했다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옆에서 뵀더니 정말 정정하셨다. 베레모를 슬그머니 머리에 올려놓으시고 훤칠한 키에 언제나 선량하신 모습이 고맙기까지 하다. 게다가 그림으로 먹고 살만하다고 전해주셨다. 삽화를 그려달라고 하는 작가들이 많아서 글로써 먹고살 때보다 더 낫다는 말이었다.

놀랍지 않은가! 80을 전후한 연세에 파산을 하고 암선고를 받았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인생이 끝났다고 포기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평생 시를 쓰면서 유명해졌으니 시를 쓰지 말라는 것도 대부분의 보통 사람이라면 ‘까짓것,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다고, 시를 안 쓰고 오래 사느니 걍 시를 쓰다가 죽지, 뭐’ 하면서 달리 살 방법을 못 찾고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의사가 시키는 대로 소탈하게 시를 포기하고 대신 그 시심을 그림으로 그려 나타냈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잘 그리겠다고 너무 욕심을 내었더라면 아마 시를 쓸 때처럼 스트레스를 받아 암이 도졌을 지도 몰랐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펜과 물감으로 그림 그리기를 즐겼다. 그랬더니 암은 암대로 물러가고 화가로서의 일가를 이루었다. 이런 일이 바로 인간 승리일 것이다. 이날 선생님의 새 책 <단테처럼 여행하기>-열림원에서 출간- 를 선물로 주시기도 했는데 그 책의 표지와 삽화를 선생님이 직접 그리셨다. 그 그림들을 보면 어떤 사심도 없이 마냥 순수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림마다 이야기가 살아나고 있었다. 노년의 단테처럼 낙엽지는 공원을 쓸쓸히, 그러나 삶을 관조하며 걷는 노인의 그림으로 후학들을 소박하게 위로하는 그림이라든지 낡은 신발들로 인생의 성실함과 정직함을 이야기하는 그림은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만ㄹ고 편안해졌다.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찌감치 늙어버리는가를 생각하면 선생님의 삶에서 배운 지혜를 전해주고 싶다. 너무도 일찌기 게임중독에 빠진 인생, 알콜중독에 빠진 사람들, 도박에, 또 뭐에 뭐에다 인생을 통째로 저당잡힌 사람들...... . 시인 전규태 선생님은 이런 때에 즈음하여 인생은 칠십에도 뭔가를 시작하고 일가를 이룰 수도 있는 나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그야말로 산 교훈이고 그 삶 자체가 후학들에겐 커다란 격려다. 당장 내 일상에 게으름을 피우는 부분은 없는지, 나태한 핑계로 도전도 안 하고 포기한 건 없는지 돌이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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