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옛날 이야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5.31 18:51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영/소설가
 

옛날에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이 문득 생각난다. 그때만 해도 일제 시대에 입었던 교복을 그대로 입고 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교복을 입을 수는 없었다. 물론 잠시 재학했던 '재건 고등학교' 시절에 잠시 교복을 입었던 적이 있기는 하다. 거의 일년간 거기서 수학했는데 여러모로 재미있고 의미 심장한 시절이었다. 야간 고등학교였기에 공장에서 일을 하고 저녁에 가서 공부를 하고 밤늦게 마쳤다. 처음 교복이라는 걸 입고 얼마나 기뻤던지. 그걸 입고 고향에 내려갔더니 내 대신 엄마가 기쁨의 울음을 우셨다.


교복도 입을 수 있어 좋았는데 학력 인정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YWCA에서 봉사활동 차원에서 운영하고 야학당으로 전입을 해서 고등학교 입학 자격 검정 시험에 합격했다. 진짜 옛날 이야기다. 내가 그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냈다는 것인데 정말 감회가 새롭다. 어제 일만 같은데. 이런 표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하는 말인데. 뭐야, 내가 할머니가 됐다는 거잖아!! 하이고, 징그럽네. 징그럽거나 말거나 나는 교복을 입은 즐거움을 이어 대학 진학에 대한 대야망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된다.

대입 검정까지 야학으로 하자니 너무 질려서 학력이 인정되는 방송통신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아쉽게도 통신고등학교 교복을 안 입어도 되는 학교라서 슬프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제 대학진학이라는 대야망을 품었으니 즐거움은 배가 되었다. 게다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미술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다른 고마운 선생님들도 계시지만 유독 그 선생님만 생각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그 분은 내 인생을 자연인에서 의식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자연인으로써 내 삶은 그 나름으로 또 의미가 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을 것이다.

말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 진학의 꿈을 이뤘다. 그때의 기쁨이란 그야말로 필설로 다하지 못한다. 첫 등록금이야 냈다곤 하지만 앞으로 일곱 번을 더 내야했다. 그때 월부 책장사를 하는 지인이 있었고 그 언니의 도움으로 나도 월부 책장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월부 책 장사도 사라졌다. 그땐 월부 책장사들의 활동이 굉장히 활발했다. 등록금 걱정을 하자 그 언니가 월부 책장사를 코치해 주었다. 당시 나로서는 그것 자체로 대단한 것이었다. 돈을 버는 일은 공장일밖에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장사라니, 그것으로 나는 신이 났다. 그 어려운 장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두려움도 있었다. 안다고는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이 말하기가 어려울 것이었다. 내 이익을 위해 아는 사람들을 찾는다는 걸 합리화 시키기 어려웠다. 합리화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수 십 장의 책 '찌라시'를 나누어 챙겨주며 그 언니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일러주었다. "먼저 니가 찾아갈 만한 사람들 명단을 작성해라" 나는 시키는 대로 했고 통상 당시 월급의 다섯 배가 넘는 돈을 한 달에 벌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부모님께 논을 사드렸다. 대학 등록금 하라고 도와준 돈이었지만 부모님으로부터 조금은 멀어져야 대학 생활을 제대로 할 것 같은 위기감이 더했다. 그 돈으로 부모님께 논을 사드리고 멀리 튈 생각이었다. 튀어 봤자 벼룩이었지만 그래도 숨을 가눌 수는 있을것이다. 아래도 동생 넷을 음으로 양으로 돌보는 건 당연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어려운 일을 몇 년간 계속하다 보니 의리고 뭐고 멀리 도망만 가고 싶었다. 가기 전에 늙으신 부모님의 장기적인 생활비를 마련해 드리고 떠나야 할 일이었다. 그런 대책도 없이 떠나는 건 도리가 아니잖은가.

바로 그 명단이라는 것에 미술 선생님의 성함도 들어있었고 나는 미술 선생님의 자택으로 찾아뵜다. 그때가 방학이어서 선생님은 댁에 계셨다. 선생님의 나의 자존심을 걱정하셨든지 서재로 나를 데리고 가셔서는 팜플릿을 쭈욱 읽으며 가격을 함께 읽으라고 하셨다. 다 읽어드렸늘 때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아까 그 미술 관련 전집이 제일 비싼 기제?" 물으시곤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걸 한 셑을 사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주 편하게 이것저것 안부를 물어주셨다.

말씀 중에 당연히 신군부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별 생각없이 나는 “저거들 끼리 해먹어라고 하지요, 뭐”라고 말씀드렸다. 미술 선생님이 말씀 하셨다. “저거 일이 아니고 우리 일이거든”이 말씀이 내 평생을 지배하게 될 줄이야. 선생님은 당시에는 아주 예사롭게 지나가는 말로 하셨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게 아니었다. 내 무지와 어리석음을 배려해서 그렇게 예사롭게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덜 무안하라고. 실제로 그때는 덜 무안했다. 그러나 철이 들어갈수록 더욱 더욱 무안해지고 부끄러워져서 함부로 살지 못하겠다. 개인적인 삶보다 사회적인 삶을 살게 됐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정부 지정곡으로 정하느냐 마느냐의 일로 나라가 떠들석 하다. 그 노래는 아름답도록 슬픈 노래다. 아름답도록 슬픈 진실이 담겨져 있는 노래다. 그렇다면 당연히 위정자들은 싫어한다. 그토록 진한 진실이 담겨져 있는 노래라면 당연 서민의 노래다. 가슴 아픈 서민만이 서로 손에 손을 잡고 부를 수 있는 노래다. 그 노래를 부르며 손에 손을 잡으면 단번에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연대하게 된다. 특히 정치라는 것이 저들만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일이라는 걸 귀하게 깨닫게 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