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름에 대하여
아우름에 대하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6.12 18:4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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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우리 같은 교수들에게는 이른바 ‘전공’이라는 것이 있다. 대개는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로 그것을 말하곤 한다. 그렇게 보면 나는 현상학 내지 하이데거철학으로 학위논문을 썼으니 ‘서양현대철학’이 전공인 셈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대학원에서 {논어}를 텍스트로 삼아 공자의 철학을 강의한다. 전공과는 정반대인 ‘동양고대철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다행히 원생들도 이것을 엄청 좋아해주고 있는 것 같아 고마울 따름이다. 사실 나는 서양철학 강의에서도 탈레스에서 플로티노스에 이르기까지 고대편에 특별히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철학에는 묘한 매력들이 많다. 그 중 하나는 그 텍스트가 짧은 단편이라는 것이다. (물론 대철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방대한 문헌이 있으므로 완전히 예외다.) 공자철학의 경우도 그렇다. 텍스트가 단편이라는 것은 전후맥락이 단절돼 있고 설명이 부족해 그 뜻이 불분명하고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그만큼 문제에 대한 인식이 직접적이고 직관적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읽는 사람의 다양하고 도전적인 해석의 시도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장점이 되기도 한다.


논어 위정편이 보이는 공자의 말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군자 주이不비 소인 비이不주)라는 것도 그렇다. 훌륭한 인간인 ‘군자’와 고약한 인간인 ‘소인’을 대비시키는 전형적인 공자식 발언이다. 이 발언에서 핵심은 ‘周’와 ‘比’다. 공자는 ‘주’를 높이 보고 ‘비’를 낮게 본다. 당연하지만 그의 이 발언은 ‘주’를 장려하고 ‘비’를 경계한다. 이것이 그의 윤리학인 것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주’와 ‘비’의 의미다. 도대체 ‘주’와 ‘비’는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전후맥락은 단절돼 있고 설명도 없다. 의미는 불분명하다. ‘주’는 주변, 주위, 주지 등의 형태로 지금도 그 의미가 통용된다. ‘비’는 비교 비례 비견 등의 형태로 그 의미가 살아 있다. 그런데 ‘주’는 일단 기본적으로 ‘두루’라는 의미가 맞지만, ‘비’가 좀 문제다. 지금 통용되는 것처럼 ‘견준다’는 의미로는 영 문맥이 자연스럽게 통하지를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옛날 학생시절부터 이 말의 해석으로 고민을 많이 했다. 이런저런 책들을 봐도 완전히 만족할 만한 해석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서양철학 전공답게 가다머의 이른바 ‘해석학’을 참고하면서 저 유명한 ‘지평융합’으로서의 이해를 시도해봤다. (그 자세한 설명은 아쉽지만 생략한다) 그 결과 나는 이 글자를 ‘치우침’으로 풀이하기로 했다. 그러면 의미가 통한다. ‘비’라는 글자 자체가 애당초 양쪽을 다 갖추지 못하고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는 모양새다. 지금의 상황에서도 이런 문제적 현상은 어디에서나 눈에 띈다.

‘주’는 두루 아우르는 것이고 ‘비’는 치우쳐 가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 해석에서 보이는 ‘총체적’ ‘편파적’이라는 것은 타당한 표현이 될 수 있다. 단, 일부 해석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것이 사람을 사귀는 것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런 설명은 공자의 발언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그렇게 함부로 의미를 축소시켜서는 안 된다. 생각이나 발언이나 행위나 공부나 하여간 삶의 태도 전반에 걸쳐 이 말은 해당된다.

공자는 인간(들)의 ‘문제적 상태’를 인식하며 그것을 시정하고자 애썼던 철학자였다. (군자는 그 대치점에 있는 인간의 이상형이다.) 이 발언도 그런 맥락이다. 그는 ‘치우쳐 가리는’ 소인배들의 삶의 모습을 문제로서 지적한 것이다. 그렇게 살지 말고 군자답게 ‘두루 아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윤리를 강조한 것이다. “군자는 두루 아우르고 소인은 치우쳐 가린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너무나 소인적이다. 한쪽으로만 기울어 있고 치우쳐 있고 쏠려 있다. 다른 반쪽은 ‘둘레’ 안에 넣어주지를 않는다. 두루 아우르지 않는다. 나머지 반쪽은 ‘그들’이고 ‘우리’가 아니다. 아니, 아예 ‘적’이다. ‘원수’다. 그렇게 으르렁댄다. 그 나머지 반쪽에 대한 차별과 배제는 거의 보편적 현상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 남북이 대결하고 있고 동서가 대결하고 있고 상하가 대결하고 있고 좌우가 대립하고 있고 이젠 남녀도 노소도 대결하고 있다. 계파나 파당의 대립은 거의 망국적이다. 인간관계의 작은 그룹에서도 이런 치우침과 기울어짐과 편가르기는 발견된다. 그것이 다 공자가 말한 저 ‘비’인 것이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도 아니다. 외국인들 혹은 국가간인들 그런 게 없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참고해야 한다. 20세기 후반의 현대 프랑스철학에서는 이른바 ‘2분법’의 극복이 하나의 공통된 기류를 형성했었다. 여기서는 간단히밖에 설명할 수 없지만, 이를테면 레비스트로스는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 푸코는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 데리다는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그 해체와 극복을 설파했다. 치우치지 말고 아우르자는 것이다. 배제하지 말고 품자는 것이다. 2500년의 시간을 넘어 공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렇게 통하고 있다.

생각도 언어도 행위도 삶도 우리는 ‘두루 아울러야’ 한다. 두루 아우른다는 것은 작은 혹은 좁은 의미의 ‘나’나 ‘우리’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 그들을 이해하고 품어서 테두리(周) 안에 넣어주는 것을 말한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어찌 장점이 없고 단점이 없겠는가. 사람이 신이 아닌데 어찌 완벽할 수 있겠는가. 그 장점가능성과 단점가능성을 다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고 함께 하는 것이 공자의 저 ‘주이불비’에 다름 아닌 것이다.

놀랍게도 공자의 이런 철학의 최고의 실천자는 저 예수 그리스도와 석가모니 부처다. 알다시피 그리스도는 유대 선민에만 치우치지 않고 선한 자에게만 치우치지도 않고 이방인과 세리와 도둑 같은 죄인까지도 다 끌어안았다. 심지어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다. 이만한 ‘주’가 또 어디 있는가. 그리고 역시 알다시피 부처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자 대자대비심을 품고 마하야나(대승, 큰 수레)를 굴렸다. 이런 주이불비!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두루’는커녕 심지어 이런 훌륭한 분들조차도 아우르지 못하고 (자신의 좁은) 굴레 바깥으로 밀어내는 ‘편파적인’ ‘치우친’ ‘기울어진’ ‘쏠려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지 않은가.

어쩌면 나의 이런 해석조차도 아우르지 못하고 어떤 치우친 공자학자는 ‘어허, 서양철학을 한 자가 쥐뿔도 모르고 감히...’하며 지탄을 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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