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제독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제독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6.22 18:2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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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
 

우리나라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이 1945년 11월 창설될 때 큰 공을 세우고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했던 해군 군번 1번(80001)의 소유자이며 해군중장 손원일 제독은 2012년 9월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분이다. 1909년 5월 5일 손정도 목사의 장남으로 평남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손정도 목사는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과 국민회 대표 등으로 활약하고 총독암살사건. 북간도 사건 등의 공적이 있고 동아일보 1931년 2월 21일 2면에 의하면 ‘민족운동의 거두 손정도 서거 향년 52세로 여러 사람들이 눈물 흘리며 애도한다’라고 보도됐다.

손정도 목사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부친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간 손원일 제독은 1915년 중국 광성소학교. 1919년 길림문관중학교를 거쳐 1924년 중국 남경 중앙대학 농학원 항해과를 졸업했다.

1927년 중국 해군의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3년간 독일에서 수학했다. 1931년 부친이 별세하자 잠시 귀국했다가 상해 독립단체 비밀 연락원이라는 누명을 쓰고 일경에 피체되어 약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중국으로 건너가 해운업에 종사하다 1945년 광복이후 귀국했다.

‘우리의 바다는 우리가 지킨다’는 신념으로 1945년 8월 23일 해사대임시사무소를 개소하고 미군과 협의하여 1945년 11월 11일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을 창설하고 초대단장에 취임했다.

해방병단이 해안경비대로 개칭되고 해안 경비대 총사령관 겸 병학교장으로 부임하고 참령을 거쳐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됐다.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이 발생하자 진압작전에 참여해 공을 세우고 성금과 정부지원금으로 4척의 pc함을 구입해 해군 발전에 공을 세웠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했고 도솔산 지구 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 참전했다. 1953년 6월 해군중장으로 예편되고 같은 해 8월 제 5대 국방부장관으로 취임했다.

이 때 일제의 침략에 대비할 목적으로 전국적인 조직체인 해양소년단을 창설하면서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은 필자의 선친께서 교사직을 버리고 대한해양소년단 총본부 교육과장이 되었고 다시 훈육국장으로 활약케 했다. 해양소년단 총재로 취임한 손원일 제독의 뜻을 받아 선친께서 생도들의 교과과정을 편찬할 때 독도답사와 교육을 첫 시간 과목으로 넣어 독도가 우리 땅임을 가르치고 현장 답사를 실시했다. 손원일 제독은 태극무공훈장과 미국 자유 훈장·독일 십자훈장 등 수많은 훈장을 받았다.

1980년 2월 15일 향년 72세로 별세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아들 손명원은 미포현대조선 사장. 쌍용자동차 사장을 역임했고 김동조 전 외무장관의 딸과 혼인했고 손녀 사위는 홍정욱 전 국회의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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