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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칠거지악(七去之惡)과 삼불거(三不去)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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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1.16  18: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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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칠거지악(七去之惡)과 삼불거(三不去)

조선 사회에서 칠거지악은 이혼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제도였다. 칠거지악은 중국 고대에서부터 발전한 유학의 예교로 부인의 행실을 문제 삼는 일곱 가지 조항을 말한다. 첫째, 아내가 시부모를 제대로 섬기지 못했을 때. 둘째, 아들을 낳지 못했을 때. 셋째, 부정(不貞)을 저질렀을 때. 넷째, 질투가 심할 때. 다섯째, 나병이나 질병 등 불치의 유전병이 있을 때. 여섯째, 말이 많을 때. 일곱째, 도벽(盜癖)이 있을 때. 남편은 아내를 정당하게 내쫓을 수 있었다.

조선 초기의 법제 ‘대명률(大明律)’에는 칠거지악에 관한 처벌 규정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칠거지악에 해당하지 않는데도 부인을 쫓아낸 경우 장(丈) 80대에 처했고, 칠거지악을 저지른 부인을 내쫓지 않는 자도 장(丈)80대에 처했다. 하지만 부부가 화합하여 이혼을 원하지 않는 자는 처벌하지 않았다. 칠거지악은 일곱 개 사항이 모두 동일한 효력을 지닌 것이 아니라 사안에 따라 경중(輕重)을 달리했다. 즉, 어떤 사항은 직접적인 이혼 사유에 해당했고 이를 수행하지 않을 경우 국가가 개입했지만 반드시 이혼하지 않아도 무방한 조항도 있었다. 국가에서는 칠거지악의 남용은 물론, 부인을 내쫓는 절차에 대해서도 각별하게 신경을 썼다. 이와 관련해서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내가 시부모 앞에서 개를 꾸짖었다고 남편이 아내를 내쫓고 사람들이 이를 효자라고 한 기술(記述)은 비록 부모의 마음에 순종한 것이지만 세속에서 아내를 버리고자 하는 사람이 인용하여 말을 만들까 염려한다’

이는 칠거지악의 남용을 경계하는 내용으로 남편이 아내를 내쫓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절차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성종 때 이윤검이 아내의 음행을 이유로 이혼했을 때, 사헌부에서 이윤검이 아내의 추행을 듣고 기별한 것은 마땅하나 사전에 어머니에게 고하지 않았다고 탄핵을 받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당시 사회는 부모가 배필을 택해 혼인했기 때문에 이혼할 때도 반드시 부모에게 먼저 알려야 했다. 따라서 비록 이윤검의 아내가 부정한 짓을 저질렀지만 부모에게 알리는 절차를 밟지 않은 것은 그의 죄였다.

한편, ‘대명률(大明律)’에 따르면 칠거지악을 범했더라도 아내가 삼불거에 해당하면 아내와 이혼한 자를 처벌하고 다시 결합하도록 했다. 삼불거란 부인을 함부로 내쫓을 수 없는 세 가지 조건으로, 첫째 아내가 돌아가신 시부모의 삼년상(三年喪)을 치른 경우, 둘째 혼인 당시 남편이 가난하고 천한 지위였으나 결혼 후 부귀를 얻은 경우, 셋째 아내가 이혼한 뒤 돌아갈 친정이 없는 경우가 이에 해당했다. 이 법규는 부인을 내쫓는 행위가 남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보호 장치로, 국가 차원에서 여인의 삶에 관심을 기울인 셈이다. 이와 관련해서 ‘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좌찬성 이맹균(李孟畇)의 처 이씨는 나이가 거의 일흔이 되었다. 그녀는 남편이 계집종을 총애하자 이를 질투하여 계집종을 움 속에 가두고 학대하여 결국 죽게 만들었다. 왕은 사간원에서 이 사건으로 이맹균을 탄핵하는 상소를 하자 그를 귀양 보냈지만 부인은 벌하지 않았다. 이에 사헌부에서 부인 이씨가 자식이 없고 질투도 심하니 칠거지악의 두 가지에 해당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그녀를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왕은 삼불거를 내세워 부인을 이혼시킬 수 없다며 반대했다’ 당시 일부 유학자들은 칠거지악에 해당할 정도로 부인의 행실에 문제가 있음에도 삼불거를 내세워 이혼을 금하는 법을 지나치게 적용하면 이를 의도적으로 남용하여 사회 질서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이유를 들어 삼불거의 남발을 우려했다. 하지만 칠거지악과 함께 삼불거는 숱한 논란 속에서도 조선 후기까지 유지되었다. 다만 조선의 마지막 법전인 ‘형법대전’에는 칠거지악에서 아들을 낳지 못한 경우와 질투가 심한 경우를 제외하고, 삼불거에 자녀가 있는 경우를 추가했다. 결국 칠거지악과 삼불거는 ‘오출사불거(五黜四不去)’가 되었고 이 법은 1908년 ‘형법대전’의 개정으로 폐지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조선시대에 공식적으로 혼인관계를 해소하려면 국가의 승인과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했다. 이처럼 국가가 혼인관계의 파탄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이유는 사회 질서 유지와 사회 문제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간통죄가 폐지되고 불륜을 로맨스로 착각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역사를 다시 한 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혼율 세계1위라는 불명예 국가가 된 것이 하도 안타까워 한 번 되새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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