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진주의 상징과 그 맥(脈) (Ⅰ)
칼럼-진주의 상징과 그 맥(脈) (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6.04 17:58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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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 교수·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장·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

강신웅/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 교수·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장·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진주의 상징과 그 맥(脈) (Ⅰ)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진주의 주요상징인 시목(市木)과 시조(市鳥)에 관하여 기술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진주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진주천년 역사의 맥(脈)을 촘촘히 짚어 가고자 한다.

우선 진주의 오랜 상징물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진주와 진주인을 대신해온 시목(市木)으로 대추나무(棗)가 있다. 대추나무는 갈매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고목의 오랜 민족수종으로 시 전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추위와 공해에 강한 나무로 재배 또한 매우 용이하며 예부터 제수(祭需)의 으뜸과일로써, 진주인의 강직한 기질과 충효로운 시민성을 상징한다. 이어 진주시민성을 상징해온 또 다른 상징물인 시조(市鳥)로써 백로(白鷺)가 있다. 백로는 원래 백로과에 속하는 새로서 몸전체가 순백색으로 비옷같은 장식이 등에서 꼬리까지 덮혀서 매우 우아하며 맑고 깨끗한 모습으로 진주인의 청렴한 선비정신과 학문성을 전통적으로 숭상해 온 시민정신을 표출하고 있다.

이어 진주 천년역사상 그 맥(脈)의 뿌리를 살피기 위해서는 우선 진주라는 지역이 갖고 있는 지리적, 역사적 대의(大義)를 개진 할 필요가 있다. 하여, 우선 진주는 경남 서남부의 중심지에 자리잡고 있다. 북으로는 함양의 덕유산과 지리산 천왕봉의 영천(靈泉)이 모이고 모여서 남강을 이룬 삼남(三南)의 중심 고을로써 남강이 굽이굽이 남해바다까지 뻗어있고, 이끼 낀 성돌마다 민족의 슬픈얼이 가득 서려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역사의 심장에서 위국충절과 문화예술의 빛나는 터전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천혜의 성지에서 예부터 뛰어난 학문의 본산으로 널리 알려진 아름다운 예향이기도 하다. 더욱이 여명(黎明)의 역사이래로 진주·진양이라는 그 이름으로 천년을 줄기차게 이어온 고도인바, 당연히 걸출의 인물들이 계속 배출되었다. 그리하여 그때 그분들은 장구한 민족의 역사적 중심에서 크게 활동했던바 명실공히 진주 이곳은 민족 정통문화의 중심지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이제부터는 진주인의 맥속에 뚜렷이 흐르고 있는 정신적 뿌리인 핏빛 충절에 관해서 얘기 하자면 옛날부터 우리민족의 윤리가운데 가장 으뜸은 충(忠)과 효(孝)일 것이다. 또한 충과 효는 민족의 학문과 사상의 근간으로 되어 왔다.

특히 우리 진주는 고려왕조 이래로 수많은 충절인(忠節人) 들이 생산된 고을로 유명하며, 그 역사 또한 천년에 이른다.

우선, 고려 현종때 거란군을 크게 무찌른 시랑공(侍郞公) 하공진(河拱辰)장군은 남으로 몽진(蒙塵)하던 당시 임금을 호위할 때 자기 자신을 볼모 까지 하면서 거란군을 물러나게 하고 본인은 그들에게 억류되었다가 그들의 숱한 회유(懷柔)에도 굴하지 않고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으로 항거하니 끝내 죽임을 당함으로써 고려인이자 진주인으로서 충절의 도리를 다하기도 했다.

그후부터 전국적으로 하공진 그분 때문에 진주는 수많은 충절인을 배출하는 고장으로 알려졌다. 다음호에도 계속해서 진주의 충절론에 관해서 기술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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