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진주의 충절과 그(脈) (Ⅲ)
칼럼-진주의 충절과 그(脈) (Ⅲ)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7.23 18:2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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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 교수·진주문화원 향토문화 연구소장·강신웅 향토인문학 아카데미 원장

강신웅/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 교수·진주문화원 향토문화 연구소장·강신웅 향토인문학 아카데미 원장-진주의 충절과 그(脈) (Ⅲ)


지금까지 주로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 나타난 몇몇 진주기생들의 독특한 충절사연을 살펴보았다.

본고에서도 역시 상기 문헌을 바탕으로 진주기생의 총체적 특성인 절개, 풍류 그리고 애국실천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남진주, 북평양”이라는 말이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될 정도로 진주의 풍류와 멋은 그 어느 지역의 기생들 보다는 뛰어났다. 그리고 조선 기녀하면 “일강계(一江界), 이 평양(二平壤), 삼진주(三晋州)” 라는 말들이 자연스럽게 전해오고 있다.

지역신문의 효시인 ‘경남일보’의 창설자인 장지연(張志淵) 선생은 1910년 1월 7일자 경남일보 진양잡영(晉陽雜詠) 이라는 칼럼에 당시 진주의 정경과 문화를 노래한 14수의 시문을 연재했다. 여기서 그는 소위 진양삼절(晉陽三節)인 풍산(豐産: 풍부한 물산), 연기(娟妓: 요염한 기녀) 그리고 죽승(竹蠅: 무성한 대나무)를 기술함으로써 진주·진양의 풍유와 멋을 만천하에 전파시켰다.

일찍이 이능화(李能和)는 그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서 “지역에 따라 그들 기생에 관한 나름의 특색들이 있는데, 우선 평양기생은 그 숫자나 기예(技藝)에서는 가장 으뜸이고, 그 다음이 진주기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진주에는 의절기생(儀節妓生)인 논개 이외에도 역대로 유명한 기생들로는 승이교(勝二喬), 계향(桂香), 난향(蘭香) 매화(梅花) 그리고 옥선(玉仙) 등이 모두 빼어난 명기(名妓)들이 있었다” 고 기술하고 있다. 이 외에도 진주기생들의 또다른 충절사연을 보면 우선 진주기생들은 타지역 기생들과는 달리 제일먼저 투철한 애국정신을 행동으로 실천하여 1919년 진주남강변에서 “왜놈들 물러가라”고 외쳤는데, 그 모두가 당시 진주기생조합 소속 기생들이였다. 여기서 우리는 뜻밖에 진주기생들은 이미(1913년) 기생조합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그들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슬기로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흔적으로 교방(敎坊)과 권번(券番)이라는 조직이 이곳 진주에만 오랜시간 존재해 온 것이다.

특히 1919년 3월 19일 기생 한금화를 비롯한 수많은 진주기생들은 타 지역에 앞서 태극기를 선두로 진주성 촉석루를 향하여 행진하면서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이때 일본경찰들은 진주지역기생 수십 명을 붙잡아 구금하자 그중 한금화 기생은 그의 손가락을 깨물어 “기쁘다, 삼천리강산에 무궁화가 다시 피누나” 라는 글귀를 흰 명주 자락에 혈서를 썼다고 전해온다.

상기와 같은 진주기생들의 애국, 애족의 정신이 오늘날 진주지역의 다양한 축제에서도 계속 재현되고 있다.

오늘처럼 비오는 날, 남강변 의기사 앞에 서면, 어디선가 수많은 여인들의 함성이 바람되어, 물결되어 도도히 흐르고 있는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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