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병풍 책가도(冊架圖)
진주성-병풍 책가도(冊架圖)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1.23 19:0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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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병풍 책가도(冊架圖)


정조왕(正祖王 1752-1800) 조선22대왕 (재위 1776-1800) 영조의 손자, 사도세자의 둘째아들, 아버지의 억울한 참화를 못잊어 수원에 성(城)을 쌓았고 소경(小京)으로 승격시키고 내왕하였다.

책거리는 책과 도자기 문방4우 화병 등 화폭에 그린 그림으로 문방도(文房圖)라고도 한다. 책을 얹어놓은 선반인 서가(書架)를 그린 그림이라 책가도라고도 불린다.

조선 후기인 18세기 후반에 처음 그려지기 시작해 양반층에게 인기를 얻었으며 19세기 이후로 서민층에까지 크게 유행했다.

책거리 그림이 유행하게 된데는 조선22대왕 정조의 영향이 컸다. 도화서 화원 전원을 대상으로 실력이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여 새 차비(差備)대령화원으로 그들은 규장각 소속으로 두어 여러 중요한 그림을 그리게 했다. 1783년 정조는 예조에 속에 있는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중 그림 실력이 뛰어난 그들을 차비 대령화원 이라고 불렀는데 영조때 임시로 운영했던 제도로 영조의 친필을 베껴 쓰는 일을 주로했다. 정조는 차비대령화원 제도를 실시 그들에게 녹취재(祿取才)라는 별도의 시험을 치르게 했다. 그림 실력이 부족한 화원은 귀양 보내는 벌을 내렸다.

정조는 신한평(신윤복의 부), 김홍도와 같이 정조의 어진(御眞), 왕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이고 이종현 아들 이윤만 손자 이형록 3대가 책거리를 그리지 않아 정조의 노여움으로 귀양보내고 후임으로 장한종 김재공 허용을 차비대령화원으로 임명했다.

1791년 정조는 궁궐에서 임금의 자리인 어좌 뒤에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병풍대신 책가도 병풍을 놓게 했다. 일월오봉도는 해와 달 다섯봉우리 그림으로 왕의 권위와 존엄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주변에서 어좌 뒤에 반드시 배치해야 하는 그림이다. 그러나 정조는 신하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고 대신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림을 어좌 뒤에 놓겠다” 정조의 명령이 실행된 다음날 대신들이 편전(便殿)에 들였는데 어좌(御座)뒤 늘 봐왔던 일월오봉도 대신 책가도 병풍이 놓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때 정조가 대신들에게 내 어좌 뒤에 이것은 진짜 책장이 아니요 알 수 없는 불순한 글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하여 이를 경계하기 위함이요 이듬해 정조는 책가도를 대신들에게 보여주며 언급했던 불순한 글에 대한 조치로 문체반정(文體反正)을 하기로 했다. 정조는 이런 문장이 조선의 전통과 풍속을 해친다며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패관소품 같은 책의 수입을 금지했고 박지원 등 불순 문체를 쓴다는 이유로 반성문을 쓰게 했다. 책거리는 서민층도 사랑하는 그림인 민화로 널리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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