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시작되기 전 설레던 마음의 모습은 어느샌가 다가온 방학의 막바지에서 안타까움으로 바뀌어 있다. 더듬어 보니 내 생에 가장 보람찬 방학을 보내리라던 애초의 원대한 계획은 물살보다 더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잡을 수 없는 시간이라는 놈과 함께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핑계를 댈라치면, 올 따라 유난히도 매서웠던 날씨라는 놈은 가슴 한번 제대로 펴고 거리를 걸어 볼 기회조차 내게 주지 않았다 그리고 따뜻한 아랫목의 그 끝 간 데 없는 유혹은 나를 그곳에 머물라고 무던히도 흔들어댔다고 탓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나의 게으름이 정당화 된다거나 나름의 위안이 될 수는 없으리라.
돌이켜 보니 난 늘 게을렀다. 학창시절의 아침 등교는 늘 부모님과의 전쟁으로 시작되었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던 시험들은 당연히 벼락치기로 감당했었다. 늘 약속시간에 쫓기었고 또 밥은 어찌 그리도 느리게 먹었던지, 게다가 결혼은 사십이 넘어서야 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조차도 이불을 뚫고 나오기 전 해대는 수없는 갈등은 아직도 나의 딜레마이고, 여전히 학생인 나의 신분은 늘 벼락치기를 하던 내가 만들어준 모습일 것이다.
그나마 변한 것은 딱 두 가지. 사회인이라는 신분은 나로 하여금 약속이라는 것을 꼭 지켜야만 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밥을 빨리 먹는 남편을 만난 덕분에 밥 먹는 속도가 예전보다도 훨씬 빨라졌다는 것이다.
초고속화 되어가고 있는 지금의 세상 속에서 나의 게으름은 아마도 나로 하여금 세상과 발맞추어 걸어갈 수 없게 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고 싶다. 세상의 속도와 나의 속도가 같아야만 하는 것인지! 나의 게으름을 부정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긍정으로 대해 볼 수는 없는 일인지!
다시 돌아보자. 나의 방학에는 게으름의 부정만이 자리 하는가.
따뜻한 아랫목의 유혹은 나의 의지를 테스트하기 좋은 장치였으며, 내 몸을 궁상맞게 만든 살을 에는 추위는 작은 온기에나마 감사를 표시할 줄 알게 해주었다. 조금은 용기를 내어 남편의 손을 잡고 다녔던 강연회들은 귀가 후 우리 집 식탁이 밤샘 논쟁의 공간으로 변모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밤사이 우리가 더 많이 자라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애당초 방학에 대한 원대한 계획 따위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저 게으른 내 자신을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불안함의 한 모습일 뿐이다. 시간도 그리 빨리 지나간 것이 아니다. 그저 많은 것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앞서니 아무리 많은 시간도 부족하다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욕심은 이루어 놓은 일에는 감사할 줄 모르는 법이니!
게으름을 긍정한다는 것은 아마도 내가 보내온 날들에 대한 후회라는 병을 치료하는 처방인지도 모르겠다. 게으름을 부정하는 것이 더 나은 삶(무엇이 더 나은 삶인지는 아직은 잘 모르지만)에 도움이 된다는 외침도 있겠으나, 나는 오늘 게으름의 긍정을 외쳐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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