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의 긍정
게으름의 긍정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3.04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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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순/경성대 무용학과 외래교수
방학이 시작되기 전 설레던 마음의 모습은 어느샌가 다가온 방학의 막바지에서 안타까움으로 바뀌어 있다. 더듬어 보니 내 생에 가장 보람찬 방학을 보내리라던 애초의 원대한 계획은 물살보다 더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잡을 수 없는 시간이라는 놈과 함께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핑계를 댈라치면, 올 따라 유난히도 매서웠던 날씨라는 놈은 가슴 한번 제대로 펴고 거리를 걸어 볼 기회조차 내게 주지 않았다 그리고 따뜻한 아랫목의 그 끝 간 데 없는 유혹은 나를 그곳에 머물라고 무던히도 흔들어댔다고 탓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나의 게으름이 정당화 된다거나 나름의 위안이 될 수는 없으리라.

돌이켜 보니 난 늘 게을렀다. 학창시절의 아침 등교는 늘 부모님과의 전쟁으로 시작되었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던 시험들은 당연히 벼락치기로 감당했었다. 늘 약속시간에 쫓기었고 또 밥은 어찌 그리도 느리게 먹었던지, 게다가 결혼은 사십이 넘어서야 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조차도 이불을 뚫고 나오기 전 해대는 수없는 갈등은 아직도 나의 딜레마이고, 여전히 학생인 나의 신분은 늘 벼락치기를 하던 내가 만들어준 모습일 것이다.

그나마 변한 것은 딱 두 가지. 사회인이라는 신분은 나로 하여금 약속이라는 것을 꼭 지켜야만 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밥을 빨리 먹는 남편을 만난 덕분에 밥 먹는 속도가 예전보다도 훨씬 빨라졌다는 것이다.

초고속화 되어가고 있는 지금의 세상 속에서 나의 게으름은 아마도 나로 하여금 세상과 발맞추어 걸어갈 수 없게 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고 싶다. 세상의 속도와 나의 속도가 같아야만 하는 것인지! 나의 게으름을 부정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긍정으로 대해 볼 수는 없는 일인지!

생각해보니, 실로 요즈음의 나는 (학창시절 내가 즐겨한 벼락치기가 가져다주었을 법한) 학생일 수밖에 없는 지금의 내가 너무도 감사하다. 그것은 아마도 공부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과 경험 그리고 상상력을 통해서도 할 수 있음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어린 시절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그리고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나 하는 핑계 같은 것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더욱 더 감사한 것은 내 남편도 아직 학생이라는 사실이다. 오호라! 이것은 또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만큼이나 어린 시절을 게을리 보냈을 남편! 그리고 지금 그와 함께 캠퍼스 커플이 되어 어릴 적에는 너무도 게을러서 즐기지 못했던 캠퍼스의 낭만을 만끽하고, 학적 동무로서 앎을 함께 탐구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경이로움까지 느끼게 한다. 나의 게으름뿐만이 아니라 남편의 게으름조차도 참으로 감사하다.

다시 돌아보자. 나의 방학에는 게으름의 부정만이 자리 하는가.

따뜻한 아랫목의 유혹은 나의 의지를 테스트하기 좋은 장치였으며, 내 몸을 궁상맞게 만든 살을 에는 추위는 작은 온기에나마 감사를 표시할 줄 알게 해주었다. 조금은 용기를 내어 남편의 손을 잡고 다녔던 강연회들은 귀가 후 우리 집 식탁이 밤샘 논쟁의 공간으로 변모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밤사이 우리가 더 많이 자라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애당초 방학에 대한 원대한 계획 따위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저 게으른 내 자신을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불안함의 한 모습일 뿐이다. 시간도 그리 빨리 지나간 것이 아니다. 그저 많은 것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앞서니 아무리 많은 시간도 부족하다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욕심은 이루어 놓은 일에는 감사할 줄 모르는 법이니!

게으름을 긍정한다는 것은 아마도 내가 보내온 날들에 대한 후회라는 병을 치료하는 처방인지도 모르겠다. 게으름을 부정하는 것이 더 나은 삶(무엇이 더 나은 삶인지는 아직은 잘 모르지만)에 도움이 된다는 외침도 있겠으나, 나는 오늘 게으름의 긍정을 외쳐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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