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하동 출신 정재운 항일투사
진주성-하동 출신 정재운 항일투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5.16 19:01
  • 14면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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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하동 출신 정재운 항일투사


정재운(鄭在雲)선생은 경남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 628번지 출신이다. 정재운 선생은 진주정씨 임진공신 충의공 정기룡 장군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장군의 훌륭한 애국·애족·애향정신을 계승하여 항일대열에 뛰어든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부친은 유학자 정보영(鄭輔榮)이고 모친은 박무인(朴戊因)이며 부인은 함흥 추씨 추정옥(秋正沃)의 장녀 추수분이다.

정재운 선생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하고 이웃에 권유한 분이다. 금남면 대치리에 소재한 현산학교에 입학하여 신·구 학문을 배우고 어려서부터 영리하여 하나를 보면 백을 깨닫는 학생이었다.

남달리 활달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분이었다.

1919년 3월 29일 하동군 진교면 진교리 장날 정재백, 이원태, 이홍식 등은 일천 여명의 군중을 지휘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다 일경에 잡혀 엄중한 조사를 받았다. 혹독한 고문으로 혼절하고 같은 해 5월 27일 부산지법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이라면서 징역 6월형이 언도되어 옥고를 치렀다.

일제가 기록한 <고등경찰관계적록>에 의하면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 정재운 양보면 통정리 정재백, 남면 덕천리 이원태, 진교면 월운리 이홍식 등이 3월 29일 구 한국기를 구하여 흔들고 진교면 시장에 운집한 장꾼들과 주민들을 포섭해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도록 선동하고 진교면 경찰주재소 앞까지 진출해 시위하다 앞장선 지도자들은 피체되었고 진압하였다”라고 했다.

정재운 선생은 1950년 4월 만 55세 되던 해 세상을 떠나니 “아 한번 나고 한 번 죽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지만 남아가 뜻을 정하고 그 뜻을 위하여 살다가 마침내 죽는다면 그 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정부는 정재운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높이기 위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후손들에게 남기신 말씀은 “영화가 가벼우면 욕됨이 작고 이익이 크면 해도 깊다” 즉 <명심보감>의 말씀을 인용했다.

또 “족한 줄을 알면 즐거울 것이요. 탐욕을 힘쓰면 근심이 된다”라는 <경행록>의 말씀을 인용했다.

후손들을 모아 놓고 충효(忠孝)를 버리면 스스로 불충, 불효의 지식때문에 근심하게 되는 것이니 충효정신을 조석(朝夕)으로 암송하라고 유언하셨다. 직계 손은 부산에 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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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인가 봄인가 2018-05-17 18:43:44
정재운 항일투사 공적이여 영원히 밫나리라

여름인가 봄인가 2018-05-17 18:43:44
정재운 항일투사 공적이여 영원히 밫나리라

여름인가 봄인가 2018-05-17 18:43:39
정재운 항일투사 공적이여 영원히 밫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