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율의 시 산책-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니까
김지율의 시 산책-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니까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6.10 18:2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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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

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니까


매일매일 슬픈 것을 본다. 매일매일 얼굴을 씻는다. 모르는 사이 피어나는 꽃. 나는 꽃을 모르고 꽃도 나를 모르겠지. 우리는 우리만의 입술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만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모르는 사이 지는 꽃. 꽃들은 자꾸만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그 거리에서 너는 희미하게 서 있었다. 감정이 있는 무언가가 될 때까지. 굳건함이란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오래오래 믿는다는 뜻인가. 꽃이 있던 자리에는 무성한 녹색의 잎. 녹색의 잎이 사라지면 녹색의 빈 가지가. 잊는다는 것은 잃는다는 것인가. 잃는다는 것은 원래 자리로 되돌려준다는 것인가. 흙으로 돌아가듯 잿빛에 기대어 섰을 때 사물은 제 목소리를 내듯 흑백을 뒤집어썼다. 내가 죽으면 사물도 죽는다. 내가 끝나면 사물도 끝난다. 다시 멀어지는 것은 꽃인가 나인가. 다시 다가오는 것은 나인가 바람인가.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꽃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다. 이제 우리는 영영 아프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영영 슬프게 되었다. (이제니,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눈을 뜨면 모르는 사이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낯설다. 눈을 뜨면 모르는 사이 너도 어제 보다 조금 더 낯설다. 우리의 매일매일은 미지(未知)의 시간과 공간 속에 있다. 불현듯. 문득 걸음을 멈추고 세상의 모든 것이 조금씩 멀어지면, 가끔 나는 없는 사람으로 여기 존재하고 없는 사람으로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사이 꽃이 피고 네가 모르는 사이 꽃이 진다. 너와 나를 ‘우리’라고 말하면 세상은 한없이 커지고 세상은 한없이 분명해진다. 그것이 무책임하고 무차별적이더라도 우리는 우리 속에서 서로를 길들이고 서로를 기억한다. 내가 너를 보듯이 너는 나를 보고 네가 나를 노래하듯이 나도 너를 노래한다. 어떤 동질성으로 혹은 어떤 괄호로 우리는 ‘우리’를 만들고 우리는 ‘우리’를 또 그렇게 지운다.

흙으로 돌아가듯 잿빛에 기대선 모든 것은 나에게서 혹은 우리에게서 잊혀질 것이다. 내가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날 테니까. 그렇게 텅 빈 어떤 날이 오더라도 시를 쓰는 일과 시를 읽는 일 그리고 우리를 만나고 우리와 헤어지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하겠다’(‘페루’)고 말한다. 나를 어떻게 증명하고 너를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설명과 해석이 아니라 우리는 느낌으로 알고 있으니까. ‘우리’라는 말이 유리처럼 깨지기 쉽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나와 너 사이 그 거리만큼 우리는 존재한다. 너무 멀거나 너무 가깝지 않은 거리. 그 거리에서 서성거린 많은 시간들. 좌절과 실패와 결핍이 너무 많은 나를 더 아프게 더 설레게 한 그 많은 우리에게, 우리로 만나 우리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적 같다. 봄을 보내고 다시 여름. 너와 더 가까이서 더 많은 공기와 햇빛 그리고 더 많은 공허에 익숙해지기 위해 우리는 낯설고 익숙한 ‘우리’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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