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율의 詩 산책-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말
김지율의 詩 산책-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7.23 18:3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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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

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말


당신…,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오늘은 먼 이국땅에 있는 아픈 당신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군요. 인연이 된다면 같은 진주에서 태어났고, 같은 학교에서 문학을 배우고 시를 썼다는 것. 그 많은 당신들을 사랑하고 분노하다 돌아와 혼자 속수무책인 사람들이라는 것. 그런 당신이 지금 타국에서 암과 싸우며 홀로 견디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신이 한국에서의 모든 것을 접고 고고학을 공부하기 위해 홀연 독일로 가던 해에 출간했던, 몸과 마음의 바닥을 깊이 흔든 시집 ‘혼자 가는 먼 집’. ‘서울 와서 내가 제일 많이 중얼거린 말/ 먹고 싶다…./ 살아내려는 비통과 어쨌든 잘 살아남겠다는 욕망이/ 뒤엉킨 말, 먹고 싶다…. 삼류인 나를 울게 했다(「먹고 싶다」)’는 시에도 밑줄을 그었군요. 그래요 마음을 도저히 붙잡을 수 없을 때마다 ‘길모퉁이 중국식당’을 낮은 목소리로 읽으면 마음 한 편이 따뜻해졌다는 말도 해야 겠군요.

시인들의 영원한 레퍼토리는 사랑과 혁명 그리고 죽음일 테고 이 모든 것은 우리들의 삶과 아주 가까워요.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열었던 상처 그리고 참혹. 또 어디선가는 전쟁이 끝나고 바람이 붑니다. 또 어디선가는 죽음과 탄생이 이어지고, 먼 그곳의 현실과 이곳의 현실이 꼭 닮았을 거라는 생각도 합니다.

20년 넘게 고국을 바라보며 당신이 애타게 찾으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간혹 이 땅을 다녀갈 때마다 고국을 떠나는 비행기의 창을 내려다보며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웬만한 채소들은 키워먹을 수 있지만 고향에서 즐겨먹던 방아만큼은 씨앗을 구할 수 없다던 당신.

그래요. ‘당신’이란 말 참 좋지요. ‘어디선가 박하 향기 나면 내가 다녀갔거니 해줘/ 계속 살아야 하는/ 살아갈 이유를 찾아야 하는 가엾은 우리’(소설 ‘박하’)라는 문장에선 그만 말을 딱 멈췄지요. 멀리서 투병 중인 당신을 응원하는 일은 당신의 시집들을 꺼내 다시 읽는 것. 모국어와 고향의 언어를 잊지 않고 보석처럼 아껴 시를 다듬었던 당신.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었던 ‘당신’이란 말. 무를 수 없기에 더 오래 ‘당신’을 부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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