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
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말
당신…,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오늘은 먼 이국땅에 있는 아픈 당신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군요. 인연이 된다면 같은 진주에서 태어났고, 같은 학교에서 문학을 배우고 시를 썼다는 것. 그 많은 당신들을 사랑하고 분노하다 돌아와 혼자 속수무책인 사람들이라는 것. 그런 당신이 지금 타국에서 암과 싸우며 홀로 견디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시인들의 영원한 레퍼토리는 사랑과 혁명 그리고 죽음일 테고 이 모든 것은 우리들의 삶과 아주 가까워요.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열었던 상처 그리고 참혹. 또 어디선가는 전쟁이 끝나고 바람이 붑니다. 또 어디선가는 죽음과 탄생이 이어지고, 먼 그곳의 현실과 이곳의 현실이 꼭 닮았을 거라는 생각도 합니다.
20년 넘게 고국을 바라보며 당신이 애타게 찾으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간혹 이 땅을 다녀갈 때마다 고국을 떠나는 비행기의 창을 내려다보며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웬만한 채소들은 키워먹을 수 있지만 고향에서 즐겨먹던 방아만큼은 씨앗을 구할 수 없다던 당신.
그래요. ‘당신’이란 말 참 좋지요. ‘어디선가 박하 향기 나면 내가 다녀갔거니 해줘/ 계속 살아야 하는/ 살아갈 이유를 찾아야 하는 가엾은 우리’(소설 ‘박하’)라는 문장에선 그만 말을 딱 멈췄지요. 멀리서 투병 중인 당신을 응원하는 일은 당신의 시집들을 꺼내 다시 읽는 것. 모국어와 고향의 언어를 잊지 않고 보석처럼 아껴 시를 다듬었던 당신.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었던 ‘당신’이란 말. 무를 수 없기에 더 오래 ‘당신’을 부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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