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율의 詩 산책-오늘 저녁 슬픔의 주인은 누구인가?
김지율의 詩 산책-오늘 저녁 슬픔의 주인은 누구인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9.09 18:44
  •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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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

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오늘 저녁 슬픔의 주인은 누구인가?


오늘 저녁/ 슬픔의 주인은 누구인가/ 돼지고기 한 근을 앞에 두고/ 부엌에 서서, 오래도록 생각하고 있는 어머니인가/그 모습을 보고 있는 아들인가/ 이상하다, 생각이 나질 않는구나/ 고추장 불고기를 해먹어야겠는데, 생각이/ 30년 동안 식당 주인이었는데도,/ 갑자기 요리법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어머니의 저녁인가/ 제가 할게요/ 제가 하지요/ 고추장 불고기 맛있게 만드는 법/ '고추장 두 큰 술, 고춧가루 두 큰 술, 후춧가루 약간…'/ 고기는 목살, 기름기 없는/ 쓸쓸한 한 근/ 주물러 재워두고, 담배를 피고 들어오는 아들의 저녁인가/ 그 사이에 잠시 잠든 어머니의 시간인가/ 오늘 저녁 슬픔은 어떤 맛이 나는가/ 고추장 두 큰 술, 고춧가루 두 큰 술…/ 아들과 어미가 저녁을 먹는다/ 마흔 넷 개띠와 여든 살 개띠가 저녁을 먹는다/ 고추장 불고기/ 으르렁 소리도 없이 양보하며 싸 먹는다/ 마지막 남은 슬픔 한 장을 서로에게 권해주면서 (장만호, ‘슬픔의 근친’)

슬픔은 언제나 무방비로 옵니다. 기억해야 할 것과 기억하지 못하는 것 사이에서 잠시 흔들리는 여든 살의 노모. 아들은 죄책감과 연민 사이에서 문득 아득해집니다. ‘슬픔의 근친’이었던 노모가 하나씩 잃어가는 것들. 그것을 바라보는 아들의 쓸쓸한 마음이 오래 느껴지는 시입니다.

옛 어머니들은 음식의 간을 맞출 때, 기억 속에 있던 눈물 맛에 맞췄다고 합니다. 30년 동안 식당 주인을 한 노모도 팍팍한 삶 속에서 ‘눈물 서 말’로 그 음식의 간을 기억할 텐데요. 갑자기 고추장 불고기 요리법이 기억나지 않는 저녁입니다. ‘제가 할게요/ 제가 하지요’ 아들이 기름기 없는 쓸쓸한 목살 한 근을 주물러 재워두고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는 슬픈 저녁입니다.

윤대녕은 ‘어머니의 수저’라는 산문집에서 음식으로 어머니를 다 얘기할 수는 없지만 음식을 얘기함으로써 언제든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또 어느 곳에서든 그 이름을 불러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된장찌개와 아욱국, 고추장 불고기와 장아찌가 올려진 어머니의 밥상.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맑아지는 그 음식들은 음식 이전에 하나의 法일 거라 생각합니다. 영화 <바베트의 만찬>에서 망명자이자 상실의 아픔을 지닌 바베트가 그녀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마련한 단 한 끼의 식사.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녀의 음식을 즐기며 상처를 치유하거나 서로를 용서하고 자신과 화해합니다. 그녀가 만든 음식의 정체는 다름 아닌 ‘사랑’이며, 그 자체가 종교이자 신화였던 것이지요.

띠 동갑인 모자가 나란히 앉아 고추장 불고기를 양보하며 먹습니다. 귀가 순한 아들과 마음이 착한 어머니가 무심히 아무렇지 않은 듯 ‘마지막 남은 슬픔 한 장을 서로에게 권해주’면서요. 한 사람의 기억이 한 사람의 기억으로 건너가고 있는 시간, 남은 한 사람은 한 사람의 지워진 기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시인은 그 시간을 ‘잠시 잠든 시간’이라고 말하네요. 오늘 저녁 이 슬픔은 어떤 맛일까요? 슬픔의 주인은 또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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