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세계사를 뒤 흔든 소금(Ⅳ)
칼럼-세계사를 뒤 흔든 소금(Ⅳ)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12.10 18:49
  • 15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세계사를 뒤 흔든 소금(Ⅳ)


1856년 인도에서 영국이 소금 전매제도를 시행하면서 무거운 세금을 물리자 이에 반발해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영국이 자국 시민들에게 염세(鹽稅)를 폐지한 지 거의 한 세기가 지난 1923년, 인도의 염세는 오히려 두 배나 올라 있었다. 인도의 염세는 세금 이상의 것이었다. 이미 지난 수 세기 동안 많은 정복자들이 터득한 바와 같이 소금 공급의 통제는 정치적·경제적 통제를 의미했다. 정부의 인허가 없는 소금 생산이나 판매는 범법 행위로 규정되었다. 소금은 영국이 정한 가격으로 영국 정부가 지정한 중개상을 통해서만 구입해야 했다. 인도인의 식단은 주로 채식으로 이루어져 있고 연중 날씨가 무더워 땀으로 인한 체내 염분 손실이 많기 때문에, 인도인에게 소금 섭취는 매우 중요했다. 식민통치를 받게 되면서 인도인들은 거의 공짜로 채취하거나 생산할 수 있었던 소금을 돈을 주고 사먹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1930년에 일어난 간디의 무저항 운동은 소금 때문에 시작되었다. 영국 정부에서 인도의 소금에 대한 세금을 두 배로 올리자 간디는 염세가 가난한 사람에게 많은 부담을 준다는 것을 알고 이른바 ‘소금 행진’을 시작했다. 간디는 자발적으로 지원한 사람들과 함께 천천히 나라를 가로질러 행진하자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반란의 불씨가 터졌다. 소금의 위대한 변신이었다.

1930년 4월 6일. 간디는 수천 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3주 동안 400Km를 걸어 바닷가에 도착한 후 거친 소금을 한 줌 집어 들었다. 머나먼 길을 걸어 바닷가에서 소금 한 줌을 줍기 위해 몸을 숙이는 간디의 소금 행진은 조국독립을 상징했다. 이는 수많은 인도인들의 동참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비폭력 무저항주의의 승리였다. 소금은 이렇게 인도의 역사를 바꾸는 데 중요한 촉매역할을 했다.

소금으로 본 중국사를 살펴보면 기원전 3000경부터 소금을 생산했는데 가장 오래된 소금 생산지는 쓰촨(四川)지방이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때부터 벌써 채소를 소금에 절여 먹였다. 기원전 27세기에 재상 숙사씨(宿沙氏)가 처음으로 바닷물을 항아리에 넣고 끓여 소금을 채취했다는 기록이 있다. 훗날 로마제국에서도 이 방법을 사용했다. 기원전 23세기 우(禹)임금이 세운 하나라에서도 중요한 치수정책의 하나가 염전관리였다. 하나라의 시조인 우임금이 황실에서 쓰는 소금은 산동(山東)지방의 소금으로 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로, 중국에서는 발해만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최고로 여겼다. 중국 고문헌 ‘상서(尙書)’에 은나라 대에 이미 조미료로서 소금이 사용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주나라의 ‘주례(主禮)’에는 소금을 관리하는 염인(鹽人)이라는 관직이 보인다. 염인은 고염(苦鹽), 산염(散鹽), 형염(形鹽), 이염(飴鹽)이라는 네 종류의 소금을 관리했다. 고염은 쓴 맛이 나는 소금으로 마그네슘염을 많이 함유한 것이다. 산서(山西)성의 소금 연못인 운성염지(運城鹽池)의 소금이다. 산염은 결정 입자가 작은 소금으로 바닷물을 증발시킨 것이다. 형염은 결정 입자가 큰 것으로 암염을 말한다. 이염은 맛이 좋은 소금으로 티베트 고원의 동북부에 위치한 현재의 칭하이(靑海)성에서 생산된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제(齊)나라가 소금 전매제로 번영을 누렸다. 제나라의 소금 산업 발전에 관해서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언급되고 있다. 사마천은 제나라를 세운 태공여상(太公呂尙) 곧 강태공(姜太公)이 ‘소금과 생선 교역이 큰 이익이 된다고 보았으며 백성들에게 교역을 장려해 제나라가 거대한 국가로 발전했다’고 썼다. 기원전 7세기의 일이다. 기원전 450년경에 철제 솥에 소금물을 담아 끓여 소금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이후 2천 년간 주된 제염기술이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252년에는 중국 쓰촨 지방의 수령이 세계 최초로 염정(鹽井)을 파는 굴착 기술을 개발해 천연가스가 함께 발견되기도 했다.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도 국가가 부강하려면 먼저 경제가 튼튼해야 한다고 믿고 다방면의 경제 부흥정책을 썼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