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500년 전 철학의 초창기에 엠페도클레스라는 철학자가 있었다. 시켈리아 섬의 에트나 화산 분화구에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 것으로도 유명한 그는 만물의 근원을 지-수-화-풍의 이른바 네 가지 ‘뿌리들’(spermata)로 설명하였다. 워낙 초창기의 인물인데다가 자세한 설명도 전해지지 않아 특별히 주목받는 경우가 많지는 않지만, 이 네 가지 요소들 하나하나가 지니는 무시할 수 없는 의의를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이론의 하나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그런데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의 이론에서는 더욱 흥미로운 점이 한 가지 눈에 띈다. 그것은 이 네 가지 요소들의 결합과 분리로 만물이 생성 소멸하는데, 그 결합과 분리의 원리가 다름 아닌 ‘사랑’과 ‘미움’이라는 것이다. 사랑으로 맺어지고 미움으로 갈라지는 남녀 간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 또한 진리에 해당한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철학적 진리는 오늘날 우리들의 삶의 주변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특히 ‘미움’에 의한 분리는 고스란히 삶의 상처로 남게 된다. 그러한 상처들로 우리는 거의 만신창이가 되어 있다. 남한과 북한 사이, 영남과 호남 사이, 서울과 지방 사이, 보수와 진보 사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 친A와 친B 사이… 그 사이에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뜨거운 김이 오르는 미움의 강물이 흐르고 있다. 언젠가부터는 경남과 경북 사이에도 작은 골이 패이더니 이제는 부산과 경남 사이, 심지어는 같은 경남에서도 중부와 서부 사이의 심상치 않은 갈등 내지 대결이 곧 잘 화제가 되기도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두 대학은 수년전 두 차례에 걸쳐 통합을 논의한 바 있다. 알다시피 그 논의들은 주체들의 진정성 부족과 이해관계 그리고 지역간의 자존심 대결 등으로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그것이 성사되었을 경우의 여러 긍정적인 효과들을 상상해본다면 그 아쉬움은 참으로 크다. 아깝게 놓쳐버린 여러 ‘이익’들은 차치하고라도 무엇보다도 애석한 것은 창원과 진주가 명실상부한 명문 국립대를 함께 공유하면서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헛되이 날려버렸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남은 것은 여전히 삭막한 그리고 소모적인 대립과 갈등뿐이다. 그것이 지금의 풍경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매순간 선택을 하게 된다. 어떤 선택은 우리를 상생의 길로 인도하고 어떤 선택은 상극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서부경남과 중부경남, 진주와 창원, 창원대와 경상대도 그런 선택지 앞에 놓여 있다. 사랑으로 하나될 것인가, 미움으로 따로될 것인가를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발걸음을 내딛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들이다. 만약에 누군가가 다시 깃발을 들어 양 대학을 하나로 통합하는 일이 실현된다면, 그것은 두 지역이 쓸데없는 상극의 대립을 풀고 화합과 상생의 길로 나아가는 결코 작지 않은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디에선가 그 희망의 싹이 자라고 있기를 기대해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