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회
동창회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5.0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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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숙/시인
5월은 가정의 달이기도 하지만 동창회 달이기도 하다. 거리마다 동창회 현수막이고 신문마다 동창회 광고다. 덕분에 광고업자도 호황이라 웃고 신문사 광고담담자도 5월만 같아라며 웃음이다. 비록 동창회 주관기는 돈이 좀 들어도 세상살이와 경제는 또 이렇게 도는가 싶기도 하다.

나는 원래 동창회를 싫어해서 그런 모임에는 단 한 번을 안 나갔다. 동창회야말로 우리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지역주의란 고질병의 주범으로 지목해왔기 때문이다. ‘고소영강부자’만 봐도 학연과 지연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그  저력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얼마 전 나도 처음으로 동창회란 곳을 갔다. 우리가 주관기라고 연락이 수 십 번 오는데 지척에서 안 갈 수가 없었다. 그동안 10년이 넘도록 그래도 안면 몰수 하니 안 나가도 잘 넘어 왔는데. 중학교 3년간 줄반장을 한 사람이 주관기 때에 안 나오면 어떻게 하느냐는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딱 한 번만 만나기로 스스로 다짐을 하고 나간 것이다.

행사를 2주 앞 둔 토요일 저녁, 집에서 가족과 이미 저녁을 다 먹었는데 전화가 왔다.  회장과 친구들 대여섯 명이 근처 식당에서 날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나오라는 총무의 성화였다. 나는 그 자리에 앉자마자 행사계획서를 보자는 말로 신고식을 했다. 예산의 약 절반이 뷔페 식비로 잡혀있었고 나머지는 술값에다 무대장치 비용에 경품비 등 이었다.

나는 그 식비를 확 뜯어 고쳤다. 촌에서 아무리 뷔페상 잘 차려내도 잘 먹었다 소리 안 나오니 점심을 산채비빔밥으로 하고 차라리 돼지를 두 마리 삶자고 했다. 그래도 이 예산은 뷔페 식비의 절반 밖에 안 되었다. 한 번 반장은 영원한 반장이라고 전관예우를 톡톡히 해줬다.

그래서 내친 김에 깻잎과 상추는 김포에서 유기농을 하는 동창에게 귤과 바나나 토마토는 경매사에게 다 떠맡겼다. 그리고 돼지를 삶을 사람과 도구와 준비물들을 정한 후 다음주말에 그 식당에 가서 비빔밥을 시식해보고 품평하기로 결정을 했다. 첫만남에서 일을 이리 만들어 놓았으니 다음 모임에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게 되었다.

거의 모든 예산이 내 손에서 집행되다시피 행사의 근간을 다 바꿔놨으니 전날 무대설치와 시설물 점검부터 당일 수육을 써는 일 돼지고기 김치찌개에서 커피 끓여내는 일까지 주방 현장 전체를 다 관리 감독해야 했다. 다음날 몸살이 나 한의원을 찾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비빔밥은 점심시간에 여섯 그릇이 남았다가 오후에는 그것도 비워져 있었다. 수육과 찌개는 푸짐하게 먹고도 남았다. 과일과 떡도. 예년 같으면 점심 먹고 기수별로 다 흩어지는데 이번에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동기별로 갈 생각을 않는다며 오후 다섯 시가 넘도록 음식을 계속 날라야 했다.

거금 100만원을 선뜻 내놓은 친구들도 몇 명이나 있었고 50만원을 낸 이들도 많았다. 돈 앞에서는 이건희도 친형과 싸우는 이 마당에 이런 행사에 돈 100만원을 선뜻 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30만원을 냈다. 내 생전에 동창회는 안 간다. 동창회비는 없다던 50년 내 자신과의 이 약속이 처절히 무너진 순간이었다.

그러나 기분이 참 좋았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아저씨들을 졸업 후 36년 만에 교정에서 처음 만났음에도 “야, 너 술 먹지마! 이 담배꽁초 봐라! ” 라는 반말이 아무 거리낌 없이 오갈 수 있어서. 그때 공부는 별로였지만 지금은 연매출 80억대의 유기농농장 사장이 되어 있는 고사장이며, 생산설비공장을 두 개나 가진 김사장 등의 명함을 받을 수 있어서. 동전도 앞뒷면이 다르고 손바닥도 앞뒤가 다르듯 동창회도 가서보니 겉에서 보던 것과 안에서 보는 맛이 달랐다. 나이가 들수록 무심히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생애 가장 영혼이 맑았던 그 순간을 함께 나눈 추억을 퇴색되지 않게 가슴 속 깊이 간직하며 산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큰 자산이다. 자신의 존재감과 자아의 실존이 그 속에서 발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접근해 보면 작은 학교 통폐합 문제는 재고해볼 일이다. 이 세상은 경제적인 논리로만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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