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등회
연등회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5.22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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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기식/진주 상봉동동 문화위원
연등행사는 일찍이 인도를 비롯해 중국, 한국 등 불교문화권에서 널리 성행해 오던 불교의 독특한 행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등에 관계되는 민속이 삼국시대 이전부터 그 나름대로 행해져 왔으나 신라시대에 와서는 불교의 연등회 행사 속에 동화되어 함께 행해졌다고 한다. 신라 때에는 해마다 정월 보름에 황룡사를 중심으로 덕 높은 고승 백명(百高座)을 초청하여 법문을 듣고 공양을 올리며 연등회가 크게 베풀어졌다고 한다.

연등회가 국가적인 행사로 확대되어 11월에는 팔관회가 열렸는데 행사에는 왕이 친히 참석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전통을 이어받아 고려초기까지는 정월 보름에 연등회가 성대하게 베풀어졌지만 한때 폐지되기도 했다. 현종 원년에 다시 부활하여 공양왕 원년에 와서 정월 보름에 행하던 연등회를 사월 초파일로 옮겨 행하게 되었다.

고려 때의 연등회는 국가적인 큰 행사였고 모든 백성들에게는 축제이기도 했다. 이날이 되면 왕실을 비롯해 집집마다 등불을 밝히고 관등놀이로 흥겹게 보냈다고 한다. 고려사에 보면 사월 초파일 전부터 어린아이들은 연등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종이를 오려 대나무에 달아 기를 만들어 성안을 누비며 쌀이나 베를 구하는 호기(呼旗) 풍속이 있었다. 공민왕은 이러한 아이들에게 베 백필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책적으로 핍박을 받던 조선시대에는 불교의 쇠퇴와 국가정책에 따라 연등회가 가끔 금지 또는 권장하는 등 다소 기복이 있었지만 민간 속에 뿌리를 내려 있었다.

동국세시기 경도잡지 열양세시기 등 문헌이나 문인들이 남긴 문장에 의하면 조선시대 연등회가 화려하게 열렸음을 알 수 있다.

연등행사의 거리풍경은 오색찬란한 등의 행렬로 대낮같이 밝았으며 휘황찬란한 연등행사의 장관을 구경하기 위하여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러한 유풍은 구한말까지도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근간에 와서 국민 축제적 풍속은 점차 사라지고 사찰에서 불교도들만의 행사로 축소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진주에서는 몇 년 전부터 10월에 남강유등축제가 대대적인 국가적인 행사로 치루어지고 있다. 등의 상징은 지혜의 공명으로 중생이 무명을 밝혀준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불교의 등 공양이다. 불설시 등 공덕경에 보면 여러 가지 연등의 공덕을 찬양하고 있다. 삼보를 믿고 자그마한 등 하나를 바치더라도 그 공덕은 한없이 크다고 했다. 또 등을 바치는 것을 연등이라고 하고 마음을 밝게하는 것을 관등이라 한다.

우리는 비록 크고 화려하진 못하더라도 정성이 담긴 하나의 등을 밝혀야 하리라. 이 시대를 구제할 큰 성원과 정성으로 영원히 꺼지지 않을 마음의 등불을 밝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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