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
《한서》<예문지>에 ‘한자(漢子) 55편’이라고 하였고 《수서》<경적지>에 ‘한자 20권’이라고 하여 금본의 편수, 권수가 다 이와 동일하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대개 금본이 《한서》와 《수서》의 양지(兩志)에 실려 있는 원본이라고 생각하며 또한 전서를 한비가 직접 저술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수와 당대 사이의 유서(類書)가 인용한 《한비자》의 일문(佚文)은 백여 조를 헤아리니 금본이 옛모습 그대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제편 중에서 한비가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라는 확증이 있거나 또는 추정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존한>편: 본편의 전반은 바로 한비가 진에 사신으로 갔을 때 진왕에게 올린 글이다. 그러나 후반, 즉 “왕이 분부하기를 한에서 온 한비가 올린 글에는 한을 아직 치지 말자고 하였다고 하오나 이사는 생각하기를” 이하의 부분에는 이사의 박론(駁論)과 진한간의 외교교섭이 자세히 실려 있어서 당시의 진의 사관이나 이사 일파가 기록한 것이 분명하며 결코 한비가 쓴 것이 아니다.
<유도有度>편: “초⋅제⋅연⋅위가 지금 모두 망국이다.”고 함은 분명히 진시황 26년 이후의 사람이 한 말이니 한비가 죽은 지 10년이 넘는 때의 일이다.
이상 3편은 모두 명문상의 반증이 있으므로 그것이 한비의 저작이 아님을 결정지을 수 있다. 이미 3편이나 믿을 수 없다면 그 나머지 편들도 쉽게 다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대저 한 대 초기에 읽어버린 고서를 널리 수집할 때에 많기만 하면 좋은 줄 알고 모아들이는 데에만 탐을 낸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전초, 찬록하는 자가 모두 감식안을 가진 것도 아니어서 전하는 제자(諸子)의 저술이 변조되지 않은 책이 드물었으니 다만《한비자》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문체로서 논한다면 <고분>⋅<오두>등의 문장은 다 짜임새 있고 심각하고 힘차고 날카로워서 한가닥의 말도 이 특징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으나 <주도主道>⋅<유도>⋅<이병二柄>⋅<양각楊搉>⋅<팔간八姦>⋅<십과十過> 등은 자못 천박하고 공허람 말이 많으며 <주도>⋅<양각> 두 편은 운자를 많이 썼으니 문체가 《회남자》와 아주 흡사하다.
<이병>⋅<팔간>⋅<십과> 등은 또 《관자管子》의 일부분과 아주 비슷하며 <충효>⋅<인주人主>⋅<칙령飭令>⋅<심도心度>⋅<제분制分>등도 그러한 점이 있다.
근본사상의 면에서 논한다면 사마천은, “한비는 인간이 좇아야 할 준칙을 정하고 사정을 재단하고 시비를 명확히 밝혔다.”고 하였다.
생각건대 한비는 가장 엄정한 법치구의자이며 가장 종합적이고 실증적인 명학가名學家로서 당시의 사이비 법가法家가 말하는 것, 가령 술術(술수)을 쓰고 세勢(기회)를 타기를 주장하는 등과는 본래가 다른 것이다. 《한비자》중의 나머지 제편(앞에서 열거한 것의 대부분을 포함해서)은 법가들의 상투어를 주워 모은 것이 많고 본 취지가 <고분>⋅<오두>편 등과 배치되는 것이 없지 않으므로 이는 한 사람의 저술이 아님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요컨대 금본 《한비자》55편은 첫머리의 양편을 제외하고는 전부 법가의 말을 근본으로 삼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으나 전부 한비의 저작이라고 말하는 것은 더 연구해 보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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