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아침을 열며-“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4.05 15:48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나는 예전에 <사물 속에서 철학 찾기>라는 책에서 ‘눈의 철학’이라는 것을 한 토막 전개한 적이 있다. 눈이 가질 수 있는 여러 철학적 의미들을 새겨본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눈의 가장 큰 덕은 ‘본다’는 데 있다. 아니, 세상에 그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걸 가지고 거창하게 철학까지 운운하는가, 하고 누군가는 코웃음을 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코웃음 칠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눈의 철학을 생각해봐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다. ‘본다’고 하는 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못한 경우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제대로 ‘밝게 본다’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기 때문이다. ‘눈 뜬 장님’이 너무나 많다. 예수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마태 7:3~5 누가 6:41~42)

나는 이것을 예수 버전 ‘눈의 철학’으로 간주한다. 예수는 ‘밝히 보지 못함’을 문제로 삼고 있다. 무엇을 보지 못한단 말인가. 그 직접적인 내용은 여기서 언급이 없다. 그건 아마 예수가 가르친 내용들 모두를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인용에서 중요한 것은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눈 속의 티끌이다. 눈 속의 들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다. 그 문제점을 예수는 날카롭게 직시하여 지적하고 있다. 티도 들보도 뺀다도 다 상징이다. 비유인 것이다. 작은 잘못과 큰 잘못과 그 고침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형제’로 대변되는 남의 잘못은 잘도 보고 잘도 지적하면서 탓을 하는데 정작 자기의 잘못은 (훨씬 더 큼에도 불구하고) 보지도 못하고 괘념치도 않는다. 요즘 한국에서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소위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도 바로 그런 태도다. 나는 그런 것을 ‘남탓주의’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은 남의 눈 속의 티끌은 잘도 보는데, 정작 자기 눈 속에 박혀 있는 거대한 말뚝은 보지 못한다. 예수의 통찰에 탄복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오죽 답답하고 안타까웠으면 이런 말을 했겠는가. 게다가 그런 자들일수록 남의 사소한 잘못을 탓하며 그걸 ‘빼주겠노라’고 주제넘게 나서기도 한다. 예수의 이 말은 실은 저 친절한 금자씨의 “너나 잘 하세요”와 그 취지가 통하는 말이다.

눈에 들보가 들어 있는 자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그들은 남의 눈에 들어 있는 티끌을 잘도 본다. 그러나 정작 봐야 할 중요한 것들은 그 들보 때문에 보지 못한다. 온갖 편견과 고집도 그 들보에 해당한다. 저 프란시스 베이컨이 알려준 소위 동굴의 우상도 그 본질은 그런 편견과 고집이다. 그런 게 진리 내지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티끌’이고 ‘들보’인 것이다.

우리는 정치인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너무나 자주 본다. 지식인들도 그 대열에서 예외가 아니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종교인들조차도 그런 사례가 없지 않다. 소위 악플러들은 가장 대표적인 ‘들보 눈’이다. 그들은 혈안이 되어 남의 눈 속의 티끌을 들여다본다.

‘눈 속에 있는 티’와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사람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그 티가 얼마나 불편한지는 누구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래서 빼내야 한다. 철학이 해야 할 일도 종교가 해야 할 일도 그런 빼냄이다. 그러나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이 아니라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내야 한다. 그게 예수의 가르침이다. 그러려면 거울이 필요하다. 거기 비춰 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 거울은 어디에 있는가. 멀리 있지 않다. 다른 사람의 눈이 바로 그 거울이다. 거기 비춰보면 자기 눈의 티끌도 들보도 금방 드러난다. 명심해 두자.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이 아니라 거기 비친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보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라야 비로소 남의 눈의 티끌을 보고 운운할 수 있다. 먼저와 나중, 이 순서 내지 우선순위를 잊지 말자. 예수의 소중한 그리고 엄중한 가르침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