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나는 예전에 <사물 속에서 철학 찾기>라는 책에서 ‘눈의 철학’이라는 것을 한 토막 전개한 적이 있다. 눈이 가질 수 있는 여러 철학적 의미들을 새겨본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눈의 가장 큰 덕은 ‘본다’는 데 있다. 아니, 세상에 그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걸 가지고 거창하게 철학까지 운운하는가, 하고 누군가는 코웃음을 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코웃음 칠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눈의 철학을 생각해봐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다. ‘본다’고 하는 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못한 경우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제대로 ‘밝게 본다’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기 때문이다. ‘눈 뜬 장님’이 너무나 많다. 예수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마태 7:3~5 누가 6:41~42)
눈에 들보가 들어 있는 자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그들은 남의 눈에 들어 있는 티끌을 잘도 본다. 그러나 정작 봐야 할 중요한 것들은 그 들보 때문에 보지 못한다. 온갖 편견과 고집도 그 들보에 해당한다. 저 프란시스 베이컨이 알려준 소위 동굴의 우상도 그 본질은 그런 편견과 고집이다. 그런 게 진리 내지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티끌’이고 ‘들보’인 것이다.
우리는 정치인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너무나 자주 본다. 지식인들도 그 대열에서 예외가 아니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종교인들조차도 그런 사례가 없지 않다. 소위 악플러들은 가장 대표적인 ‘들보 눈’이다. 그들은 혈안이 되어 남의 눈 속의 티끌을 들여다본다.
‘눈 속에 있는 티’와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사람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그 티가 얼마나 불편한지는 누구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래서 빼내야 한다. 철학이 해야 할 일도 종교가 해야 할 일도 그런 빼냄이다. 그러나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이 아니라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내야 한다. 그게 예수의 가르침이다. 그러려면 거울이 필요하다. 거기 비춰 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 거울은 어디에 있는가. 멀리 있지 않다. 다른 사람의 눈이 바로 그 거울이다. 거기 비춰보면 자기 눈의 티끌도 들보도 금방 드러난다. 명심해 두자.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이 아니라 거기 비친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보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라야 비로소 남의 눈의 티끌을 보고 운운할 수 있다. 먼저와 나중, 이 순서 내지 우선순위를 잊지 말자. 예수의 소중한 그리고 엄중한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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